오늘도 도서관 앞에서는 아침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여지없이 들려왔다.
아침 일찍 온 한 열람생이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도서관 문을 왜 정각 8시에 열지 않느냐 하는 것이 다툼의 이유였다.
도서관 입구의 게시판에 적혀있는 도서관 규칙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따지고 드는 데는 직원도 별 대수가 없었다.
우리가 그를 처음 본 것은 그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공인중개사 공부한답시고 책을 싸들고 독서실로 들어간 날씨가 막 추워지기 시작한 초겨울이었다.
독서실에 칩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을 때,
그는 꾀죄죄한 모습에 얼굴은 많이 수척해 있었고 어깨 위에는 비듬이 눈처럼 허옇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런 탓에 실제 나이보다 대여섯은 더 들어 보이는 그를 따뜻한 커피가 있는 인근 다방으로 데리고 갔다.
난로 옆에 그를 앉히고, 아직 시험이 10개월이나 남았는데
벌써 그렇게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공부할 것 있냐고 하였지만,
그는 과목의 수가 5과목이나 되며 보아야 할 책의 분량이 만만찮다고 했다.
평소 성실한 그다운 말이었지만 그의 단호한 말에 위문공연차 온 우리의 입장이 오히려 난처해지기까지 하였다.
그의 시간을 뺏은 미안함을 따뜻한 국밥 한끼 사 먹이는 것으로 대신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러던 그가 독서실 생활에 지루함을 느꼈는지 공공도서관에 나타나 식전 댓바람부터
도서관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도서관에 왔어도 여전히 그의 성실함을 잃지 않았는데,
뒤늦은 나이에 향학열에 불탄 그를 신이 내려온다 해도 막을 수 없었다.
아침에 도서관 문을 열자마자 들어가 마치는 밤늦은 시각까지 공부를 하였다.
이제는 도서관 직원이 그의 눈치를 봐서라도 일찍 문을 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도서관 마치는 시각까지 단 한끼의 점심만 먹고 저녁도 먹지 않았다.
그는 저녁 먹는 것이 귀찮아서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밥 먹는 시간조차 아까워 저녁을 거른다는 것을 잘 안다.
그는 아침에 도서관에 도착하면 우선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연거푸 서너 잔을 마신다고 했다.
무리한 공부로 전 날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아
카페인이 섞인 커피의 힘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 마셔댄다고 했다.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공부에 집념하는 그를 보며 이유야 어떻든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서 자리에 앉으면 점심식사 때까지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질 않고 공부했다.
마치 의자에 커다란 말뚝을 박아놓은 듯 오전 내내 고정자세다.
오줌도 조절하여 한꺼번에 몰아 누는 것 같았다.
오후 또한 마찬가지였다.
점심 식사 후에는 다시 커피 서너 잔을 마신 후 밤 10시에 집에 갈 때까지
저녁도 거르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한번씩 담배를 피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곤 하였지만 철저하게 휴식시간을 10분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그의 모습은 책상 칸막이 위로 반쯤 올라온 머리털 한 올 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반달 모양의 그의 머리뿐이었다.
우리는 그를 '칼자세'라고 별명을 붙였다.
앉아 있는 자세도 칼처럼 곧았지만 무엇보다 그의 공부하는 성실성이
자로 잰 듯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무더운 여름날에 에어컨 시설도 잘 되어 있지 않은 열람실에서
그는 공부에 원수진 사람처럼 등줄기에 땀을 줄줄 흘리면서 책과 시름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런 날은 수박 한 덩이 사들고 물 흐르는 인근 계곡에서 더위를 식히자고 옆구리를 찔러보아도
그는 돌아앉은 돌부처처럼 고개만 가로 저을 뿐이었다.
공인중개사시험이 60점을 넘어 합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100점을 맞을 각오로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있느냐고 그를 부추겨도
공부가 유일한 취미이고 특기인 그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어느덧 여름이 가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로 접어들자 그는 더욱 공부에 매진했다.
그에게는 공휴일도 없었고, 도서관이 쉬는 날에는 독서실과 대학 도서관을 전전하며
공부가 자기 인생의 전부인 양 그렇게 몰두하고 있었다.
주위에서는 그를 정신이상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무슨 고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60점만 획득하면 되는 자격시험에
저렇게 목숨을 걸고 있으니 그렇게 부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이렇게 무리를 하게 되자, 한번은 도서관 화장실에서 얼굴을 씻다 코피를 쏟기도 했다.
중개사 공부하며 코피 흘리는 사람은 전국에서 너밖에 없을 거라며 우리는 축하해 주었다.
우리는 그러는 그가 안쓰럽다 못해 수석은 몰라도 충분히 차석은 할거라며
비아냥거림 아닌 진심 어린 위로를 하기도 했다.
나이가 75세로 연로하신 그의 노모는 과거(?)를 치르기 위해 공부하는 아들이 걱정이 되었는지
없는 돈에 보약이다, 뱀장어 국이다, 곰국까지 해서 갖다 바쳤다.
그는 그 나름대로 누에고치와 이상한 무엇으로 혼합시킨 근 백만 원에 호가하는 특수 영양제를 사서 먹었다.
시험날짜가 가까워지자 긴장을 하였는지 이제는 우황청심환을 매일 한 알씩 먹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결전의 날은 다가왔고 시험을 치르고 나온 그는 의기양양했다.
그동안의 고생이 헛되지 않아 보였다.
시험을 치르고 나서 자신을 얻은 그는 발표도 나기 전에
이제는 법무사 시험과목이 어떻게 되며 무슨 책이 좋은지 주위 사람에게 묻고 다녔다.
그는 아예 공부로 평생을 살 모양이었다.
그러던 중 인터넷에 건교부에서 발표한 임시정답인 가답안이 공개되자 주위는 술렁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정답을 맞춰본 결과 문제가 작년보다 어렵다느니,
잘하면 커트라인을 넘기겠다느니, 말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합격여부를 떠나 과연 그가 수석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였고
다른 사람이 합격을 하든 떨어지든 그것은 우리의 관심 밖이었다.
자신만만해 하던 그도 정답이 공개되자 초조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스스로 정답을 맞춰보기가 힘들었는지 우리가 채점해 줄 것을 원했다.
가로등이 외롭게 밤을 밝히는 농협창고 앞 넓은 뜨락에는 밤이슬이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풀섶의 풀벌레도 우리의 채점결과가 궁금한 듯 잠시 소리를 멈추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우리는 차안에 불을 켜고 채점하기 시작했다.
그는 멀리 떨어져 그가 좋아하는 담배를 연신 빨아대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채점을 해보니 생각보다 틀린 문제가 많아
우리가 문제 책형을 잘못 선택했나 싶어 다시 확인하였지만
문제 책형과 정답이 같은 A형으로 잘못되지 않아 우리는 얼굴을 번갈아 보며 의아해 했다.
한 사람은 정답을 부르고 또 다른 사람은 문제 번호에 맞으면 동그라미 표시를 하고
틀리면 빗금을 치기로 하였는데, 동그라미보다는 비가 바람에 비켜 날리듯 사선을 그어댔다.
이윽고 그의 문제지는 동그란 도넛은 별로 없고 온통 비로 장식되었는데,
이것은 간간이 내리는 가랑비가 아니라 굵은 소나기가 되어 내리 퍼붓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정답을 요리조리 잘 피해 가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채점을 하면서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웃을 수도 없고 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결과는 전 과목 과락에 평균은 100점 만점에 32.5였다.
우리는 아연질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떨어지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32.5라니,
이것은 그의 공부한 양과 성실성을 옆에서 지켜본 우리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고,
있을 수 없는 점수였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결과였다.
아마 모르긴 해도 이 점수라면 뒤에서 수석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어쨌든 '수석은 수석이다' 라고 하며 차안에서 서로 악수하며 파안대소했다.
그는 어떻게 대학을 들어갔을까.
기부입학자가 아닐까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어이없이 웃고 있던 우리는 이제는 화가 나려고 했다.
나는 정말 그 빛나는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철저한 배신이었고 기만이었다.
우리는 시험삼아 문제지에 무작위로 정답을 모두 3번으로 처리하고 채점을 해 보니 28.25가 나왔다.
그가 받은 점수는 연필을 굴러 답을 적은 것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거의 일년 동안이나 행복으로 이어지는 모든 통로를 스스로 차단하고 오로지 공부만 열중했다.
그는 도대체 책을 대면하고 앉아서 지식 습득이 아닌 도를 닦고 인생공부를 한 것일까.
그래서 그의 빛나는 머릿속에 뚜렷한 철학이나 새로 터득한 인생관이라도 꽉 차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화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남부끄러운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비밀로 하기로 모의하고
피색 짙은 선지국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새벽까지 그와 함께 있으며 위로했다.
말이 위로지 마음 속으로는 서로 그의 빛나는 머리를 연신 쥐어박고 있었다.
그는 지금도 도서관에 나간다.
그의 어머니와 가족들은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그를 만류하지만 그는 중개사시험을 재수하고 있다.
올해엔 공부방법에 시행착오가 있었다고 일축하면서
요즘도 도서관에 제일 먼저 도착하여 그의 유일한 취미인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어찌 보면 그의 시험결과를 불을 보듯 지금도 훤히 내다볼 수 있지만
그의 대책 없는 성실성은 여전히 주위를 놀라게 한다.
그는 올해에 분명히 수석을 하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열심히 공부한 것으로 치면 분명히 수석을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결과로 치부되는 경쟁사회 속에서 과정의 성실성은 깡그리 묻혀져 있다.
그의 우직하면서도 요령 없는 성실성이 사회의 냉혹한 벽에 부딪쳐 좌초되긴 했어도,
그의 집념과 노력, 초지일관하는 자세는
성급하고 나약한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어떤 면에서는 좋은 가르침을 주기도 한다.
성실성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것이다.
그의 성실성은 비록 시험에서는 보상받지 못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회의 또 다른 분야에서는 그런 성실성만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우리 인생에는 '하면 된다'가 아니라 '해도 안 되는 것'이 있나 보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많은 세월이 흘러버렸을 테니 삶은 또 다른 질곡인가보다.
아무튼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할 텐데 도무지 그럴 것 같지가 않으니 걱정이다. 요즘의 매서운 날씨에 작년의 겨울이 생각나는 간사한 마음이다.
그래도 한낮의 햇빛이 영 춥지만은 않다.
그가 보고 싶다.
12.28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시험 출제의 유형이나 빈도수, 난이도, 경험자들의 여러 유익한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공부하는 방법과 요령을 좀 터득하여 성실을 그 위에 얹어 공부한다면 좀 더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안타깝네요.
12.28
[합격]이라는 단어로 모든것을 보상받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앞엔 두려운것이 없다..믿습니다.^^*
12.29
주인공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바보스러운... 공부도 좋지만 굳이 그래야 할까...
12.29
대학시험 본다고 그 난리를 치던 재작년이 생각나요. ^^ 칼자세의 근처도 못갔지요. 누가 뭐래도 그의 성실성하나는 정말 존경스러운걸요. ^^
01.06
공부를 하는 그의 마음자세는 존경할만 합니다.평생을 공부로 보낸다?적절한가요?.........저는 그렇지 못했거든요 아파서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