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이상한 일입니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왜 사람들은 자꾸만 울적해지는 걸까요.
청량하기 이를 데 없는 날씨에다 온갖 먹거리가 풍성한 이 좋은 가을 날,
왜 우리 마음에는 한 잎 두 잎 쓸쓸한 낙엽이 쌓이는 것인지.
아마도 그건 멀리 있는 사람들이 생각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잊었다고 생각한 것들이 자신도 모르게 소록소록 떠올라서.....
슬픔은 솟구치는 데 잠시이지만 가라앉히는 데는 한참이 걸립니다.
이 가을, 추억으로 가는 열차, 사색과 성찰의 나무의자 하나.....
둘. 스무 살을 목전에 둔 어느 해,
저녁 노을이 숨막히도록 예쁜 가을날 그녀와 나는 하행열차를 탔습니다.
기차를 타고 나는 끝없이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을 눈치 챈 듯 그녀는 웃었습니다.
그 아련한 미소가 내 가슴을 또 얼마나 저리게 했는지.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면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어디 먼 곳으로 이민을 간다는 그녀.
고국에서의 마지막 가을을 그저 무덤덤히 보내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말에
함께 떠나게 된 여행. \"가지 않으면 안 돼?\"열차가 논산역을 막 지나고 있을 무렵,
몇 번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나는 그 말을 꺼내 놓고 말았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보다 그때는 내게 더욱 절실했던 문제를.
정말이지 나는 그녀를 멀리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
버스만 타면 갈수 있는 그런 곳에 그녀가 있어 주기를 진정으로 바랐으므로,
\".....\"대답 대신 그녀는 쓸쓸히 웃었습니다.
정해져 있는 선로처럼 정해진 길을 가야 하는 그녀의 입장으로선
나의 그 투정 섞인 물음이 못내 가슴 아팠을 것입니다.
차라리 따뜻한 말로 보내줄 수 있었더라면.
어차피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초연하게 보내줄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그녀의 마음이나마 덜 아프도록.....
셋.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쉬운 일이지만 사랑이란
내 마음을 넓히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사랑은 어떠한 경우에도 집착이 아님을, 자기 중심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선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음을.
나의 슬픔을 뛰어넘어 환한 웃음으로 그를 마주할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랑한다 할 수 있는 것.
어른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린애도 아닌 십대의 후반.
삶의 길을 부지런히 모색해야 할 시기인지라 그때 다가온 사랑은
서로간의 가슴앓이로 그칠 공산이 큽니다.
산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
그 시기엔 두 가지 다 버거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 모두를 더욱 성숙시킬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 또한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해진 진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아픈 가슴앓이로 인해 자기 삶이 더욱 풍성해지고 윤택해질 수도 있음을.....
넷. 이별할 때, 그 동안 이렇게 사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질 것입니다.
그 마음대로 사랑하기를.
사랑이 다른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것이 커지기 시작하면
자신조차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송두리째 던져 주고 싶은 충동....
사랑에 빠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해야 합니다.
사랑이라고 불리는 그것, 두 사람의 것이라고 보이는 그것은 사실,
홀로 따로따로 있어야만 비로소 충분히 전개되어
마침내는 완성될 수 있는 것이기에.
사랑이 오직 자기 감정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은 사랑이 자신을 연마하는 일이 됩니다.
서로에게 부담스런 짐이 되지 않으며 그 공간과 거리에서
끊임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십시오.
두 사람이 겪으려 하지 말고 오로지 혼자 겪으십시오.
다섯. 모든 사람을 한결같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보다 큰 행복은, 단 한 사람만이라도 지극히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도 그저 상대만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하며,
대개의 경우처럼 자신의 향락을 사랑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그와의 관계를
끊을 만한 각오가 되어 있는가, 라고 자문해 보십시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은 사랑이라는 가면만 쓰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