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세대인 본 기자에게 반미는 무거움이었다.
반미는 80년대 초반 미문화원을 점거한 선배들이 유리창에 붙인 <양키고우홈>이라는 붉은 글씨였고, 추운 중국집 골방에서 세미나 북으로 읽어대던 <해방전후사의 인식>, 그 딱딱한 활자였다.
분단부터 시작하여 우리 현대사의 모든 비극은 근원에 있어 미국이 중심에 있다는 나의 미국관은 그러나 반미가 주는 무거움에 스스로 눌려 늘 나만의 반미로 머물러 있어야 했다.
이런 움츠림은 일에서도 나타나, 미국 관련 기사는 다 써놓고도 개인 피씨에서 잠자는 경우가 허다했다.
미국 주둔 62년 동안의 10만 건이 넘는 주한미군범죄를 일일이 상기시켜주는 글은 너무 장황한 것이 아닌가 라는 자문을 던졌고, 소파(SOFA)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은 너무 딱딱하다고 스스로 평가를 내렸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이걸 누가 모를까.. 라는 회의를 가졌고, 또 반대로 어떤 경우에는, 이런 것에 누가 관심을 가져라고 물러섰다.
그런데 올해초 나는 우리 사회에서 무거운 반미가 가벼운 위치로 순식간에 변신하는 모습을 목도했다. 바로 오노에 의해 촉발된 젊은 층의 반미운동.
수십년동안 은밀하게 유통되어온 반미라는 구호를 저렇게 노골적으로 빠르게 확산시킬 수 있는가를 지켜보는 것은 분명 충격이상이었다. 그러나 애써 나는 저것은 반미가 아니라고 해석하려 했다.
내가 알고 있는 반미는 저렇게 가벼워서는 안됐다. 그건 즉흥적인 값싼 민족주의였고, 깊이없는 유행이었다. 그러니까 반미는 금메달을 되돌려달라는 단순한 요구일 수는 없는 것이었으며, 반미는 축구선수의 골 세레머니로 상징될 수 있는 이벤트가 아니었던 것이다. 최소한 내게는 그랬다. 반미는 무겁고 심각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