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벨은 울리지 않았다.]
사랑은 사랑만으로 온전해지는가.
새벽녘까지 이어지는 더위로 세상 사람들 모두가 짜증에 못 이겨 잠든 시간.조금은 괜찮다고 생각했던 한 남자에게서 고백을 받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랑은 사랑만으로 온전해지는가.
처음 만났던 남자도 그랬고 그 뒤로 만나는 남자 또한 그랬다. 좋아서 만났다기보다 나쁘지 않아서 만났다. 그리고 새벽 3시에 조심스럽게 나에게 고백했던 그 남자 역시 나쁘지 않았다. 조건을 따진다기보다 성격이나 의외의 섬세함, 나에 대한 배려 따위나 그렇게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1년이 넘게 흐른 지금, 나는 그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물론 내 입장에서나 그랬겠지만- 거절을 했고, 그 때 떠올렸던 그 질문, 사랑이 사랑만으로 온전해지느냐는 질문을 또 다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때처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지 못할 것이다.
Womanizer, woman-womanizer, you're a womanizer oh
womanizer oh, You are a womanizer baby
You You You are
You You You are
womanizer, womanizer, womanizer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Womanizer가 한참동안 울려 퍼질 때까지 나는 눈을 뜨지 못했다. 마침내 노래가 거의 끝날 갈 때쯤 눈을 떠서 휴대폰을 확인했을 땐, 희미하게 현석오빠의 이름이 떠 있었다. 전화를 받지 못한 내가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그는 자는 중이었냐며 물었다. 그는 늘 그렇듯이 술을 한 잔 걸친 상태였다.
"응, 자고 있었지."
내 말에 그가 이유 모를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와중에, 새벽에 걸려 온 그의 전화에,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떠올리고 말았다. 현석오빠를 좋아하게 되면서, 도대체 내가 왜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했었다. 스스로 묻고 또 물었었다. 그러다 내린 결론은 K를 닮았다는 거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현석오빠가 닮은 사람은 K가 아니라 경일이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았다. 그 웃음소리. 내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경일이의 그 웃음소리. 현석오빠가 조금 전에 나에게 흘린 그 웃음소리와 같았다.
"난 친구들하고 속초 놀러 왔어."
"아 그래?"
"내가 겨울바다 보러 가자고 했는데, 아무도 가자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는 어울리지 않게, 그리고 술을 한 잔 걸치면 나에게 그래 왔던 것처럼, 앙탈 아닌 앙탈을 부리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의 이런 방식의 전화 라던지, 앙탈에 가슴이 떨렸을 법도 하고, 전화를 끊은 뒤에 그 두근거림에 잠을 이루지 못했을 법도 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목소리에서 애잔함을 발견하고 안타까움을 느꼈을 뿐이다. 그는 우리가 통화한 지 꽤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잊은 듯,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묻고 장난스러운 농담을 던졌다. 정말 잊은 걸까. 내가 현석오빠에게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제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는 완전히 잊은 듯 했다.
"그냥, 니가 어제 문자 하기도 했고, 친구들도 너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 하기도 하고, 그래서 전화했어."
"그랬어?"
그는 마지막에 그 이야기를 했다. 친구들이 나를 궁금해 한다며. 평소 같았으면 그 말도 사실, 따지고 보면 별 말이 아니었다. 작년에, 그러니까, 내가 한참 현석오빠를 좋아해서 마냥 좋았던 그 때, 나는 현석오빠의 친구를 몇 번 만났었다. 그러니까 친구들이 나의 안부를 궁금해 한다는 이야기쯤은 일종의 인사치레로 들어도 좋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새벽, 현석오빠에게 그런 전화가 걸려 오기 하루 전, 나는 혜영언니를 만나 그의 진짜 이야기를 들었다.
혜영언니도 꽤 오랜만에 만났다. 8월에 보고 안 봤으니 3달만에 만나는 거였다. 사실 현석오빠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이야기는 2달 전에 들었다. 혜영언니 역시 현석오빠와 가깝게 지내는 사이이니 그 일을 모를 리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혜영언니는 나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에 화가 났다기보다 내 자존심을 지켜 주려는 혜영언니의 배려쯤으로 여겼다. 다만 그냥 '언니,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언니에게 왜 말 해주지 않았냐고 추궁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어요.'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언니."
"응?"
"제가요. 얼마 전에 누구한테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현석오빠가 민경이랑 사귀었다면서요."
"누구한테 들었는데?"
"에이, 그게 중요한가요, 뭐. 그냥 들었어요. 언니한테 왜 말 안해줬냐고 뭐라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구요."
"아직도 사귀고 있어."
내가 2달 전에 아는 언니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랬다. 작년 4월, 5월께쯤 만나서 얼마 안 만나다가 헤어졌다고, 민경이 붙잡았지만 현석오빠의 이미 마음이 떠나서 헤어졌고 민경은 아직 매달리는 중이라고. 그런데 혜영언니는 아니란다. 아직 사귀고 있는 중이란다. 둘이 사귀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만큼 머리가 띵 했다. 헤어졌다고 들었는데, 여자가 일방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중이라고 들었는데 아직 사귀고 있는 중이라니.
"너 어디까지 들었는데? 그래야 내가 말을 해주지."
"그냥, 작년 5월쯤 만나서 결국엔 헤어졌는데 민경이 현석오빠한테 매달리고 있다는 얘기요."
"그래? 걔네, 사랑해서 사귄 거 아니야."
"그럼요?"
"그리고 걔네 작년 11월? 그쯤 부터 만났어. 그런데 아직 한 번도 잔 적 없고, 심지어 손도 안 잡았어."
"엥? 그게 뭐예요?"
혜영언니의 이야기는 이랬다. 우리 모임에 처음 민경이 나왔을 때, 그러니까, 작년 6월 이후로 현석오빠와 민경은 급격하게 친해졌다고 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고 했다. 서로 자주 문자도 주고 받고 전화도 주고 받다 보니 더 친해졌고 현석오빠의 성격, 여자들이 참 오해를 잘 하도록 만드는 그 성격이 그러했듯, 민경에게도 똑같이 대했다. 민경 역시 그러했듯, 다른 여자들처럼 현석오빠의 그런 성격을 오해했다. 현석오빠는 민경을 동생으로 봤고 민경은 현석오빠를 남자로 봤다. 현석오빠는 민경을 보호해줘야 할 것 같았고 민경은 현석오빠에게 기대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사귀기로 했다고 했다.
민경은 원래 숫기가 없는 여자였다. 어디 하나 나서기를 좋아한다거나 누구 앞에서 크게 웃는다거나 처음 본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여자는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게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기준같은 건 없다. 다만 현석오빠에게는, 현석오빠의 친구에게는 그런 모습이 낯설게 다가왔을 것이다.
자신의 여자친구라며 친구들에게 민경을 소개시키러 나간 자리에서 민경은 별 말도 없고 어울리지도 못했으며 뚱하게 앉아 있기 일쑤였다고 했다. 내가 아는 바로는, 현석오빠와 그의 친구들은 적어도 10년 이상씩 된 관계였고 호탕하고 술 마시기 좋아하는 성격이 비슷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앉아 있었다니.
나도 작년 여름쯤, 현석오빠의 친구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일부러 약속을 잡고 만났기보다는 우연히 연락을 주고 받다가 서로 술을 마시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 친구들은 이번 기회에 잘해보라며 내 등을 떠밀었고 못 이기는 척 술자리를 빠져 나와 나만 따로 그들과 어울렸다. 남중,남고,공대라는 남자들만의 세계를 거쳐 온 현석오빠와 그의 친구들에게는, 숟가락과 물을 챙겨 주는,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닌 일에도 열광했고, 낯가림이 심한 편도 아니었고, 술도 한 잔 걸친 상태였던 나는 그의 친구들과 어렵지 않게 친해질 수 있었다. 심지어 알아서 번호를 주고 받을 정도였다. 혜영언니는 아마 내가 현석오빠의 친구들을 만난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혜영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때의 내 모습을 떠올리자, 뭔가 현석오빠의 기분이 이해가 될 듯도 하여 씁쓸하기까지 했다.
나중에 시간이 점점 흐르자 민경은 현석오빠에게 더 많이 기대게 됐다고 했다. 현석오빠 역시 민경을 지켜 줘야 할 것 같다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했던 관계였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나 보다. 서로를 지치게 만드는 관계로 변질되자 결국 현석오빠는 민경에게 이별을 통보했다고 했다. 그러자 민경이 울기 시작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 뒤로 몇 번의 현석오빠가 이별을 말할 일이 있었지만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울기 시작하는 민경 때문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관계가 계속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건, 그러면서, 민경과의 그런 일이 계속 되면서 현석오빠가 나를 생각하는 횟수 역시 많아졌다는 데 있다.
"며칠 전에 내가 너한테 전화한 적 있지? 니가 전화 못 받은 날. 그때 현석오빠랑 나랑 창환오빠랑 같이 니네 회사 근처에서 술 마시고 있었는데, 마침 니 생각이 나서 전화한거거든. 근데 니가 안 받더라. 그랬더니 현석오빠가 묻더라, 안 받냐고. 난 그냥 회의중인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조금 있더니 자기가 알아서 너한테 전화 걸더라? 분명한 건, 현석오빠가 너를 좋아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런 감정은 아닌데, 적어도 너를 많이 신경 쓰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야."
혜영언니가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들의 관계가 그 이후로 1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손 한 번 잡지도 않은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그리고 마침내는 서로 연락을 안 하는 관계가 되어버렸다는 지금.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형식적인 겉껍데기만으로 둘러싸인 연인관계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연인사이였고, 현석오빠가 나를 떠올린다고 해서 내가 즐거워할 이유는 없었다. 오해해서도 안될 문제였다. 내가 사람들에게 기댈 공간을 찾아 비집고 들어가기보다는 오히려 기댈 공간을 만들어 주는 사람으로 살아온 것처럼, 어쩌면 현석오빠의 삶도 그러했으리라. 그리고 이따금씩 불어오는 찬바람에 마음까지 시려 오면 그 역시 나처럼 기댈 누군가가 필요했으리라. 그런 생각에 미치자 현석오빠의 그런 말과 행동에 큰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아졌다. 사실, 그런 말과 행동에 너무 깊게 의미를 두었다가 크게 데였던 게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혜영언니가 나를 향한 현석오빠의 감정에 대해 그렇게까지 단정지을 수 있는 거라면, 좋아하는 건 분명히 아니라면서 확실한 선을 그어 버릴 수 있는 거라면 더더욱 오해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사랑이 사랑만으로, 단지 사랑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닐 수 있다 해도, 순도 100%의 진실성 없이는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관계였다.
현석오빠와 나의 관계는, 다같이 있는 자리에서 나를 둘러싼 농담에 내가 밝게 웃지 못하고 표정이 점점 굳어가자 -그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컴플렉스와 같은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에 밝게 웃기도 좀 뭣한 상황이었다.-그 분위기를 무마해보겠다고 던진 그의 과격한 농담부터가 시작이었다. 어쩌자고 그런 농담을 했는지 분위기는 더 어색해졌고 나는 그 자리에서 그의 그런 농담을 웃어 넘겨야 할지, 정색해야할지 몰라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그가 계속해서 내 옆에 앉아 미안해 했는데, 사실 처음 현석오빠를 본 순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사실 뭐 그렇게 기분 나빠 할 일도 아니었다. 콩깍지가 씌었다고 까지 할 수는 없었어도 적어도 '트렌스젠더'라는 농담쯤은 그냥 웃어 넘길 만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쿨하게 넘어갈 일도 아니었는데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쿨한 척 했는지 모르겠다. 그 뒤로 우연찮게 알아낸 그의 번호로 다짜고짜 연락을 했고, 후에 그가 이야기하기를, 나의 그런 적극성이 고마웠다고 했다. 정작 자기가 말은 그렇게 내뱉어 놓고 내가 상처받지 않았을까 후회를 했었다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와 주고 받는 연락이 많아질수록 내 마음만 커져 갔다. 그는 술에 취해 새벽녘에 전화하는 일이 잦았고 나 역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가도 그의 전화가 오면 벌떡 일어나 걸걸한 목소리로 아직 잠들기 전이었다는 빤히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했다. 새벽 2시건 새벽 5시건 현석오빠는 상관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는 그 시간에 전화를 걸어 술 취한 목소리로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면서 내 잠을 깨웠어도 단 한 번도, 미안해 한 적이 없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거짓으로 둘러싸인 나의 쿨함이 그에게는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한 것쯤으로 여겨졌을 것이고, 그걸 몰랐던 나는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을 나에 대한 호감쯤으로 여겼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어긋났고 싸웠고 마음에 쓰린 상처를 남겼다. 그때의 우리는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어떻게 하면 좀 더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까 고민하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있는 말, 없는 말을 모두 동원해 모질고 거친 말을 내뱉어 놓고도, 스스로 분을 삭이지 못해 그가 떠난 자리에서 한숨을 거친 숨을 몰아 쉬어 놓고도, 차마 마음만은 쉬이 져버리지 못해서 끝끝내 그를 이해하지는 못하면서 이해하려고 들었다. 그랬다. 나는 여전히 그에게 아닌 척, 괜찮은 척, 쿨한 척 행동했고, 그도 그 모습을 또 다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렇게 일방적인 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뭔가 마음이 휑했다. 이토록 휑한 마음이 비단 쌀쌀해지는 날씨 때문만은 아닐 일이었다. 몇 달 전, 민경의 오빠가 갑작스런 사고로 비명횡사했을 때도, 현석오빠는 차마 그 장례식장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어쨌거나 아직까지는 연인사이니까, 아니, 연인사이를 떠나서라도 일단은 알고 지내는 오빠 동생 관계로라도 그 자리를 찾았어야 했지만, 분명 민경은 현석오빠를 남자친구라고 소개할 것이었고, 아직 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경의 부모님을 마주하는 일이 어려울 것 같아 그만두었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혜영언니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전했다. 그리고 끝으로, 혜영언니는 요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현석오빠 부모님의 사업이 요새 어렵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얼마나 마음이 외로웠을까, 얼마나 쓸쓸할까. 그래서 기댈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 생각에 미치자 내 마음까지 휑해지는 것이었다.
분명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남의 연애에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듯, 나는 현석오빠에게 있어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고, 우리는 이러한 관계였다며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모임에서 배려랍시고 던진 격한 농담으로부터 시작된 관계'라던가, 그냥 '알고 지내는 오빠 동생 관계', 혹은 '서로의 마음의 심한 생채기를 낸 관계', 아, 또 이렇게 이름을 붙일 수도 있겠다. '일방통행.'
'날씨춥다.감기안걸리게옷따뜻하게입고다녀~'
한참을 고민하다가 한 글자 한 글자 손 끝으로 조심스럽게 찍어 문자를 보내면서도 수 만가지 생각을 했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에게 이런 문자를 보내는가. 그렇지만 나로서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다. 날씨도 춥고, 마음까지 추울 그에게, 오늘 혜영언니에게 들은 이야기같은 건 전혀 티 내지 않고서 내 마음을 전하는 일이란, 이런 방법 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원래 그는 답장이 느린 편이라 금방 반응이 올 거라는 기대같은 건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전체문자쯤으로 여기고 아예 답장이 없을 수도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30분쯤 지나 내가 집에 도착할 때쯤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오랜만이라며, 너도 감기 걸리지 않게 옷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며.
2007년 12월 31일, 무슨 드라마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그 때만큼은 가슴이 먹먹하도록 뭉클해졌던 드라마가 있었다. 아마도 예전에 했던 드라마를 재방송 했던 것 같다. 그 드라마를 보고 난 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전에 사귀었던 그, 경일에게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함께 했던 일은 사소한 것 까지 기억하면서, 정작 그의 휴대폰 번호 11자리를 까맣게 잊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싸이월드를 통해 쪽지를 보냈었다. 2008년이 되면 당신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겠노라고, 그냥 이 말이 하고 싶었다고, 고마웠고 미안했다고. 사실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었지만,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한다고 해서 금방, 쉬이 그를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핑계라면 그 드라마때문이었다는 핑계를 댈 수 있겠다. 그 쪽지를 보낼 때, 뭔가 그에게 답장이라던지 놀랄만한 반응같은 건 기대하지 않았다. 3시간 뒤에 온 답장으로, 아주 무덤덤하고 형식적인 안부인사와 자신이 더 미안했다며 잘 지내라는, 더 이상의 말도 꺼내지 못하게 막아 버린 벽이 배달되었다. 나는 그 쪽지 하나를 쓰면서도 한 글자 한 글자를 쓰면서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굉장히 가슴 절절하게 썼는데 그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지나간 옛 여자의 안부인사쯤으로 여겼던 모양이었다. 그의 답장을 차라리 안 받았으면 좋았을 법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현석오빠의 문자를 받았을 때의 기분이 그러했다. 차라리 그런 형식적인 문자같은 건 받지 않는 게 더 좋았을 법 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그렇게 열 손가락의 손톱을 길게 내세우고 핏줄기가 훤하도록 할퀴었으면 그만이지, 왜 아직도 나는 그를 이해하려고 들고, 손에서 놓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늦은 시각 걸려 오는 그의 전화를 받아 들었을까, 그리고 잠결에 못 받았다면 못 받은 대로 그만뒀어야지 왜 굳이 다시 전화를 걸었을까. 나에게 무슨 감정이 있을 거라고 믿는 것도 아니면서, 냉정하게 뿌리치질 못하는 걸까.
어쩌면 그는 단순한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기댈 누군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그 상황이 어느 정도 해결되거나 자신이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이 생기고 나면, 한때나마 머무른 은신처 같았던 나에게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또 그렇게 연락을 끊을 것이다. 술에 취한 채 새벽녘에 전화를 걸어 더 이상 나를 깨우는 일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다음날 아침 눈을 떠서 내 이름 세글자가 또렷하게 적혀 있는 통화목록을 확인하고는 몇 번의 욕을 하며 후회를 할지도 모른다.
나는 결국 별 것 아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내 마음이 괜스레 황망해져, 술도 마셨고 피곤 할테니 얼른 자라는 인사로 서둘러 전화를 끊고 나니, 문득 민경에게는 전화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알 바 아니라고 치부해버리면 끝일 문제인데, 그래야 하는데, 왜 그런 문제까지 내가 신경 쓰고 있는 걸까.
처음에 다른 언니에게 현석오빠와 민경의 관계-혜영언니에게 들은 진실이 아닌 왜곡된 사실-를 들었을 때, 그 언니가 말했다.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연락이 와도 받지 말고, 너도 하지 말라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정말 그래야겠다고 굳게 다짐했었는데. 또 다시 그를 안타까워 하고, 그를 이해하려고 들고, 그의 연락을 받고 있다.
누군가는 이번이 기회라고 말한다. 그가 그렇게 힘들어 할 때 곁에서 지켜 주면서 잘해보라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과거가 무슨 상관이냐고 말한다. 어차피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는 거라고. 그게 무슨 대수냐고.
정말 중요하지 않은 걸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게 다투었던 사이가, 다시금 서로에게 따뜻한 정을 품을 수 있는 관계로 변화할 수도 있는 걸까. 현석오빠와 나에게서 그런 감정이 다시 일어나기나 할까.
혜영언니는, 현석오빠와 민경의 관계가 시작될 때쯤, 나도 이미 현석오빠를 잊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아 이야기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예전처럼 매일 같이 현석오빠를 떠올린다거나,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한 판 싸우고 난 뒤로, 현석오빠는 새벽녘에 술에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거는 일도 없었고, 흔한 안부 문자같은 것도 보내 온 적이 없었다.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믿은 건지, 아니면 다시 안 볼 사이까지는 아니니 적당한 거리는 유지해둬야겠다고 생각한 건지,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그렇게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결론은 어쨌거나 그게 둘 다 한테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다같이 만나는 자리에서 종종 마주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애절함 같은 건 없었던 것이다. 다만, 우리가 언제 싸우기나 했냐는 듯, 시간이 흐르자 어렸을 때 아무 이유 없이 싸웠던 일쯤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뭔가 낯선 어색함이 흐르고 있기는 했다.
묘한 적막감으로 둘러싸인 새벽, 그리고 수만가지 생각으로 뒤덮인 공간. 그와의 통화 한 통으로 잠이 싹 달아나 버렸다. 멀뚱히 누워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면서 간간히 들어오는 주황 불빛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쩌면 잠시 숨죽였던 보호본능이 다시금 되살아나서 민경과의 관계를 계속 이어 나갈 수도, 모질게 마음 먹고 눈 한 번 딱 감고 민경과의 관계를 끝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관계의 지속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이렇게 덩그러니 남겨져 있을 것이고, 거하게 술에 취한 밤, 현석오빠는 또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걸 것이고, 나는 또 심호흡을 길게 한 번 하고 그 전화를 받을 것이다.
어쩌면 더 이상 벨은 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일방적이었던 감정처럼 계속해서 어긋나는 일방통행으로 관계가 유지될 지도 모른다. 그것에 대해 좋다 나쁘다라고 단정짓기보다는 그 어느 한 순간까지 계속될 관계, 그 순간까지는 아무도 모를 이 관계는 계속 되어야만 한다. 앞으로 서로를 더 얼마나 할퀴게 될지 상처를 내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이 관계가 또 다시 어떻게 변질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관계는 계속 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