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낯선 사람에게 비밀을 털어놓기 쉬운 법이다.
적어도 그 비밀에 대해서, 그 낯선 이는 지나친 위로와 격려도, 질책과 비난도 않을테니까.
이제 겨우 7개월 알고 지낸 친구에게 가슴 속 깊이 묻혀져있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술을 거하게 마셨기 때문도 있겠고,
며칠 전, 그 친구 역시, 남 몰래 가슴 속에 품어왔던 아픈 비밀을 털어놓았기 때문에,
나도 뭔가 하나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때문일 수도 있었다.
차라리 나았다.
10년을 알고 지낸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보다야,
채 1년도 안된 친구에게 내 비밀을 말하는 것이.
그래서 오히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더 담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이야기 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너는 내가 아니니까, 평생을 가도 이해 못할 일이니까, 뭐라고 하지 말라며.
때로 남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을 수 있었을테지만,
스물네 해라는 아직은 짧은 시간을 살아오면서,
내가 겪었을 수많은 상처와 스트레스는 그들의 선망의 대상 안에 포함되어있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내가 큰 줄 모르고 자랐다.
초등학교 1학년, 아니, 우리때만 해도 국민학교였을때.
국민학교 1학년, 전학을 와서 인사를 할 때, 나중에 친구가 그런 얘기를 했다.
한 5학년쯤 되는 언니인 줄 알았다고.
8살때 140cm였으니까 할 말 다 했다.
나는 내가 그렇게 크다고 못 느끼고 살았는데.
사람들은 아니란다.
내가 크단다.
키가 몇이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대답해주는 것도 귀찮았는데,
누군가는 내 뒷통수에 대고 욕지거리를 해댄다.
씨x, 키가 XX게 크다며.
누군가는 또 그런다.
남자 만나기 어렵겠다며.
원래 키 큰 남자들도 작고 아담한 여자를 좋아한다며.
그 이야기를 내 면전에 놓고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다만 욕이 섞여있지 않고, 다소 순화된 말투로 아직도 들려온다.
길거리를 지나면서 느껴지는 시선부터 시작해서,
이제 갓 스무살이나 되었을 법한, 어린 놈의 자식들이, 딴에는 자기도 큰 편인데,
저 앞에 자기만큼이나 큰 여자가 지나가니까,
신기했는지 눈에 뻔히 다 보이는데도 옆에 나란히 서서 지나간다.
그리고는 뒤돌아서서 자기 친구들을 보며 웃겨 죽는다.
차라리 같이 맞붙어 싸울 법도 한데.
같이 면전에 대고 욕을 해주면서,
어디 반토막만한게 그걸 다리랍시고 붙이고 다니면서 돌아다니냐고 모욕을 줄 법도 한데.
지하철에서의 쑥덕거림도, 시선도,
혼자 스트레스를 다 받아가며 그렇게 넘긴다.
그렇다고 해서 바보천치는 아니다.
전혀 안 싸우는 건 아니니까, 전혀 욕을 안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깊은 상처쯤으로 여기면 된다.
어차피 태생이 이래서, 변할 수 없이 가져가야하는 거니까.
우스운 건, 어느 정도 내가 그들의 말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삶에 있어서 남자와 사랑이 전부는 아니어도,
남자 만나기 어렵다는 말이 왜 그렇게 제일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남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키에 상관없이 나 좋다는 남자도 많았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괜히 발끈해서, 걱정하지 말라고, 키 큰 남자들 많다고,
오히려 더 오버하고 허세를 부린다.
한참이고 7개월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매화수 4병과 소주 3병. 그리고 담배 한 갑을 다 피워가면서.
그러자 그 친구가 그런다.
사람들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내가 가진 이런 식의 자격지심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감정과 말과 행동들.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고.
그래.
바보같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게 문제겠지, 싶다가도,
굳이 말로 해야 알아듣나?
먼저 다가와서 한 번쯤은 진지하게 왜 그러느냐고 물어봐줄 수도 있지 않나?
한 번쯤은.
10년을 알고 지낸 친구들이라고 몇 있는 사람들에게도.
차마 내가 왜 사람을 못 믿고, 말을 못 믿는지,
구구절절 늘어놓자니 너무 내 세계에 갇혀있는다고 말들만 많을 것 같아,
이유 없이 그냥 그렇다며 둘러댄다.
예전엔 참 하고 싶은 말들도 많았고, 그래서 많이 했는데.
쉴 새 없이 떠들었는데.
왜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입을 닫게 되는걸까.
중요한 일은 하루 밤 내내 혼자 고민해서 혼자 결정을 내린다던 그 친구 말처럼,
나 역시 자꾸만 모든 일을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는걸까.
그것이 옳든 그르든.
아직은 짧은 이 인생, 이 인생을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말할 수 없는 이 비밀에서부터 시작한 모든 일들이,
내 주변에 벽을 더 높고 단단하게 쌓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친구들끼리 우스개소리로 하는 말처럼,
밖에 나와있어도, 누구 하나 찾지 않아, 울리지 않는 폰처럼.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할때는, 두 발 벗고 뛰어나가 도왔는데.
슬프면 안기라고 가슴을 내어주고, 힘들다고 고개를 숙이면 같이 술을 마셔주고.
핸드폰 열기에 귀가 온통 뜨거워도 내내 그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너무나도 일방적인 관계였다는 생각이 든다.
행여나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물어보고, 들어주고, 알아주고.
다 헛 짓거리였나.
내가 그들을 필요로할 때는 아무도 없던데.
내가 먼저 찾지 않으면, 연락 한 번 없는 사람들.
인생을 잘못 살았나보다.
연락하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하루에도 수십번 속으로 이야기해도.
마침내는 어쩔 수 없니 내가 두 손들고 또 연락하겠지.
뭐하냐며.
술 기운이든, 맨 정신에든.
이런 낯선, 아니, 낯익은 외로움을 이제는 견뎌낼 법도 한데.
이따금씩 이런 식으로 벅차오르는 감정은, 주체할 수가 없다.
일방적인 관계.
다 정리해야지.
정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