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현재와는 전혀 다른 어렵고 힘든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들만의 세계관이 따로 있었다.
현재의 가치관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일은 요즘 청년들이 범하는 가장 큰 오류중의 하나이다.
1. 술과 주정뱅이
경제발전의 중요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이것은 단지 돈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아예 차원이 다른 것이다.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서 현재는 지금 말하려는 모습이 없어졌다.
가난이라는 것은 세상 전체를 잡아먹는 악마가 아닐까 싶다.
내가 어렸을 적 살았던 경기도 광명리가 전체적으로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던 도시였는지는 모르겠다.
대체로 사람들은 가난했고 토박이 보다는 시골에서 올라온 신입들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서울 인근이라 땅값이 싸다보니 특별한 재산이나 기술없이 상경한 촌뜨기들이 대부분이었다.
남자들은 대부분 건설노동자로 품을 팔던 사람들이었고, 번듯한 직장을 다니며 월급을 받는 사람들은 동네에서 소문이 날 정도였다.
어쨌든 우리 가족이 거주했던 골목은 밤마다 두가지 소리로 유난히 시끄러웠다.
하나는 술먹고 주정하는 가장의 고성방가였고, 또 하나는 그 남편에게 두들겨 맞는 여자들의 비명소리였다.
남자들의 삶이 고되서였을까? 아니면 본래부터 못되먹은 인간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서일까?
왜 그렇게 술주정을 하는지 어린 나로서는 두려운일이었지만, 가난이라는 현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이 락(rock)음악은 매우 명확하고 특별했는데,
밤 9시만 넘어도 집집마다 하나둘씩 특징적인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당시는 야간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귀가가 비교적 빨랐다.)
술에 취한 남편이 자신의 여편네에게 입에 못담을 욕지거리를 하면서 폭력이 시작되고, 남편에게 맞는 부인에게서 울음소리와 함께 세상살이에 지친 여자의 비명이 함께 울렸다.
마치 어느집에서 더 크게 소리가 나는지 경쟁이라도 하는 듯 했고, 그것은 일상적인 골목 풍경이었다.
당시 내 나이가 너무 어려서 민감하게 들렸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목수인 아버지는 거의 사나흘에 한번씩 술주정을 했고, 초인종소리가 일정한 여유없이 쉬지 않고 울릴때면 우리 남매는 눈치를 챘다.
나와 누나들은 지하실이나 옥상으로 피신했고, 어머니는 도망가지 않고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았다.
매우 긴박한 상황이었으며, 민방위훈련이 따로 없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비명과 울음소리를 누나들과 함께 숨죽여 듣곤 했는데, 어머니의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음이 뜨끔했다.
어린 나이지만 어머니가 우리 남매를 구하기 위해 대신 맞고 있다는 상황을 충분히 인식했고, 나에겐 정서적으로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릴때 등장하는 명분은 '무식'하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한글을 알았고 어머니는 학력이 전무한 문맹자였는데, 10살도 안된 내가 듣기에도 폭력의 명분으로 온당치 않았다.
문제는 이런 일이 너무 자주 반복됐다는 점이다.
몸도 마음도 피폐했다.
장남인 목수 이아무개는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왔을 때 홀몸이 아니었다.
큰아들보다 어린 남동생과 두명의 여동생, 그리고 5남매는 자신의 부양가족이었다.
총 8명의 식솔들뿐만 아니라 출가한 5명이나 되는 친동생들은 우리집을 제집 드나들 듯 다녔다. 그 동생들도 그나마 625전쟁으로 인해 몇 명을 잃었기 때문에 10명이 넘지 않은 것이었다.
동생들이 우리집을 찾을 때 중요한 목적은 주로 돈이었다.
모두가 어려웠지만 고모들이 하다못해 포장마차라도 하려면 약간의 자금이 필요했다.
여기서 어머니와 고모의 갈등은 심각했다.
어머니는 돈이 없어 행상을 하는 입장이었고 동생들보다 자식들 입에 풀칠하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 몰래 적지 않은 돈을 동생들에게 갖다 주었다.
한번은 목돈을 빌려간 고모들때문에 어머니는 자기 아들보다 어린 고모들과 크게 싸운 일이 있었다.
이후로 고모는 우리집에 오지 않았고, 아버지의 폭력 명분은 무식하다는 것에서 "자기 집안만 아는 여자"로 바꼈다.
2. 아버지 이해하는데 30년 넘게 걸려.
삼촌은 형뿐만 아니라 큰누나 보다 나이가 어렸다. 형보다는 7살이나 어렸다.
삼촌이 어려서부터 우리가족과 살면서 얼마나 심리적인 고생을 했을것인가는 충분히 짐작한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아버지같은 형밑에서 자신보다 나이 많은 조카들과 함께 청소년시절을 보낸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어머니도 자식과 똑같이 대할수는 없었을 것이다.
부모없이 형수밑에서 조카들과 함께 사는 삼촌의 마음은 얼마나 서러웠을까?
불만이 있어도 마음속에 묻고 지내는 것이 습관화 됐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삼촌은 우리 가족을 떠나 멀리 가버렸다.
수도권에서 자란 삼촌이 왜 연고도 없는 부산까지 가서 자리를 잡았는지는 나중에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입대전 결혼했던 아버지는 그 시대의 남자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쥐뿔도 없으면서 사정없이 애를 낳았다.
거주자도 얼마 되지 않는 시골의 두메산골에서 살다가 댐이 만들어지면서 고향이 수몰됐고 대가족을 이끌고 서울변두리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박대통령을 좋아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평소에는 날품팔이를 했는데 힘든 일이지만 지원자만 많고 일거리가 없었다고 한다. 새벽부터 일거리를 찾다가 실패하면 어깨가 축 쳐져서 집에 돌아오는데, 아버지의 모습을 멀리서 보던 어머니도 힘이 쭉 빠졌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로는 일자리가 넘치기 시작했다.
힘깨나 쓰는 일이었지만 하루종일 일하고 나면 대가족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신의 입장에서 보면 박대통령 집권이전과 이후가 피부로 느낄 정도로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이다.
서민들은 떡하나라도 더 주는 사람들을 좋아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의 삶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아버지가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서울역에서 깡패짓도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가 20살이 넘어서였다.
대가족을 거느린 가장이 할 일이 없어 서울역에서 행인 들 삥을 뜯었다니 사람을 탓하기 전에 가난한 세월을 원망하고 싶다.
어쨌든 목수 이아무개는 술만 먹었다하면 가족들을 때리고 기물을 부셨다.
옆에서 관찰한 내가 보기엔,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그의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특색이라면 가족을 때리고 물건을 부수면서도 뭐가 그리 서러운지 계속해서 울었다는 것이다.
술취한 남자가 감정이 겪해져서 자기 마누라에게 이년저년 쌍욕을 해가면서도 자신은 울고 또 울었다.
남자는 술먹으면 무조건 운다는 잘못된 선입견이 내 머리속에 박힌것도 이때였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지 않은가?
남자가 술먹고 울면 재수없다고 쫓아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 변화는 나이가 들면서 시시때때로 변했다.
본인이 한 집안의 가장이 된후, 아버지를 이해하는 입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만약 나라면, 아버지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8명이나 되는 부양가족을 맡을 자신이 없다.
이것은 대단한 생활력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인정해 줘야 한다.
둘째,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청소년기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운 적이 없었다.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친구들에 비해 내가 유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덕분이다.
셋째, 아버지가 술주정이 심하고 특히 어머니에 대한 폭력이 심한것은 형언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지만,
인간 자체는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 않다.
남에게 피해를 주고 기쁨을 느끼는 인간 말종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사람이며, 정의롭지 못한 일에 분노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결론적으로 술주정하는 것만 빼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를 평가할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아버지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서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625전쟁에 직접 참전하고, 대가족을 이끌고 서울에 올라와 산전수전 다겪은 한 사람의 인생을 나는 절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입장을 바꿔 생각한다는 쉬운 어구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와 평생을 같이 살아온 어머니의 현재 평가는 매우 호의적이다.
예전에 술주정받아주던 일은 까마득히 잊은 듯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머니의 의견을 존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008년 내가 갖고 있는 가치판단은 아버지에 대한 평가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나는 그에 대해서 반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제 70대 중반이다.
엊그제도 아버지 얼굴을 보고 왔지만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현재 치매에다 3일에 한번씩 피를 거르는 투석치료를 받아야 한다.
거의 식물인간이나 마찬가지다.
젊었을 때는 부인을 그렇게 때리더니 지금은 마누라의 보호없이는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입장이 됐다.
조강지처에게 잘하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남자들은 말년에 부인의 보호를 받는다. 예외도 있겠지만 아버지를 보면서 실감하고 있다.
3. 어버지 얼굴 한번 보는 것이 책 한권 읽는 것과 같아.
'감동’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난 아버지 얼굴을 볼때마다 감동한다.
젊었을 때는 휘돌아치던 사람이 지금은 완전히 어린애처럼 돼버렸다.
현재 어머니와 아버지는 경기도 부천에서 살고 있고 나는 서울에서 산다. 한달에 몇 번씩 어머니 집을 가지만, 아버지는 나를 볼때마다 조카 이름을 부르며 반긴다.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은 아예 거동을 못하고 자리에 누워 있다. 노인네가 장기간 누워있는 모습은 설명 안해도 잘 알것이다. 방안에 인분냄새는 말할 것도 없고 갖가지 불결한 환경이 어머니를 더 힘들게 한다.
병간호 하는 사람이 먼저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상황이 묘한 것은 어머니가 어버지의 건강을 유난히 걱정한다는 점이다. 나같으면 젊었을 때 나를 그렇게 괴롭혔던 사람인데 괴씸해서라도 잘 안해줄 것 같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먼저 가면 자신도 할 일이 없다면서 상당히 남편을 위하고 있다.
젊었을 때는 기대할 수 없었던 잉꼬부부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4.나도 아버지처럼 된다!
나라고 별수 있겠는가?
나이들면 똑같이 병들고 똑같이 고생하다가 저세상으로 가겠지.
제행무상, 제법무아- 어려운 삼법인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 얼굴 한번 보면 모든 공부가 끝난다.
얼마전, 작은 나의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였다.
좁지만 남자 한명은 충분히 자리잡을 수 있는 마루에서 여자처럼 다리를 곱게 접고 얼굴을 두 무릎 사이에 포갠 체 오랫동안 생각했다. (난 이것을 사유라고 말하고 싶다. 참선자세로 하려고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나에겐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가끔 몇시간 동안 이렇게 고민한다.
항상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과거보다 앞으로 남은 현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과거라는 것이 항상 아름다운 것은 절대로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일수도 있지만, 과거에 얽매이기에는 현재가 너무 아깝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지나가는 시간이 너무 빠르다. 시간은 정말 유수같다.
과거에 묻혀 살다가는 금방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과거는 마음에 묻자.
내가 아버지를 이해하는데 30년이 넘게 걸린 것처럼 내 자식도 나를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겠지.
5살 먹은 내 아들이 나의 아버지 인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처럼 삶은 무상하다.
나는 그저 절반 남은 나의 인생을 위해 열심히 살아갈 따름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나의 삶도 어버지의 전철을 따라가는 것은 아닐까?
겉으로 보기엔 다른 인생같지만 세상은 비슷한 삶의 궤적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내 딸이나 아들도 나중에 똑같은 말을 하는건 아니겠지.-아버지 이해하는데 30년이 넘게 걸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