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장자의 호접지몽 그리고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비가 온다는 예보는 없었다.
새벽 4시, 생각지도 않았던 철야에, 생각지도 않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우산은 없고 집에는 가야하는데,
그칠 기미 없는 장대비와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만 가는 내 몸만 남아있을 뿐.
몇 분을 창가 끝에 서성거리다가 결국 택시를 타고 집에 가기로 했다.
그렇게 첫 차 시간 까지 기다렸다가 집에 가려던 내 계획은 장대비에 처참하게 무너졌다.
내 몸에 대한 애정 결핍과 관리 소홀로 걸려버린 결막염 때문에,
때마침 안경을 쓰고 다녔었는데,
이렇게 비가 쏟아질 때 안경이 얼마나 불편한지,
한 번쯤 안경을 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공감할 것이다.
쏟아지는 빗물에 안경을 적셔가며 뿌옇게 바래진 풍경 사이로,
하얀 불빛과 주황 불빛들이 현란하게 지나갔다.
금요일 밤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4시, 대한극장 앞.
생각보다 오가는 차들은 없었고, 그 중에 택시는 더욱 없었다.
콜택시를 불러야 하나.
전에 한 번 콜택시를 부르려고 전화를 걸어본 적이 있었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안내' 언니 목소리에,
귀찮아서라도 그냥 기다리다가 대충 오는 택시를 타겠다고 마음먹었다.
비는 계속 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오가는 사람은 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 내 신세가 처량한 것 같았다.
토요일 새벽, 술 한 잔 걸치지 않은 여자가 비를 맞으며 택시를 잡고 서 있는 꼴이라니.
허한 마음 만큼이나 모습도 허했다.
아무리 허공에 대고 팔을 휘저어보아도,
가득 가득 사람을 실은 택시들만 지나갈 뿐,
누구 하나 내 앞에 '빈 차' 등을 켜고 멈춰서는 택시는 없었다.
그렇게 10분정도 기다렸나보다.
저 멀리서 불을 번쩍이며 다가오는 택시가 너무나도 반가워,
더 열심히 팔을 휘저었다.
이제 그만 좀 여기에 멈춰달라며.
"어서 오세요."
"네, 송파등기소요."
"네?"
"송파등기소요."
"네."
"오늘 비 온다고 했는데 우산 안 가져오셨어요?"
"아, 네, 몰랐어요."
"뭐 닦을 거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룸미러를 통해 보이는 운전기사의 얼굴이 마치 이외수 작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닌가, 그냥 그렇다고 오해한 건가. 사실, 가진 게 많아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한 사람, 아니, 행복해할 줄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묘한 고뇌를 엿보았다.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팔과 다리를 닦고 머리를 털었다. 차 안에서는 묘한 애완동물의 냄새가 났다.
이 시간에, 전에 탔던 손님이 강아지나 고양이쯤을 안고 탔을까?
이런 냄새가 택시 안에서 왜 나는 거지?
"동호대교 타고 가서 올림픽대로로 빠지면 되죠?"
"네."
"그런데 왜 이 시간에 집에 가세요?"
"아, 이제 퇴근 했어요."
"무슨 일을 하시길래..."
택시 기사의 질문에는 다분히 의심이 섞여 있었다.
뭐하는 여자이길래 새벽 4시에 퇴근을 해서 집에 가냐는 질문이었다.
회사 동기가 새벽녘에 퇴근했을 때도 택시 운전 기사에게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했다.
밤에 일하시는 분이냐고. 그 말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하는 직업이라고 대답했다고 했다.
딱 맞는 말이었다. 밤낮 구분 없이 일하는 직업.
"아, 광고회사 다녀요."
"아, 광고회사요?"
자기가 추측했던 직업이 아니라는 듯, 뭔가 이해했다는 듯,
기사의 말에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광고회사라면 이 정도 퇴근은 이해 한다는 듯 한 그의 말이
아이러니 하게 우스우면서도 씁쓸했다.
기사는 다소 멋쩍었는지, 노래를 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한 노래였는데, 가수 이름도 노래 제목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건 상관없었다.
얼른 1분 1초라도 집에 도착해서 가방을 내던지고 털썩 드러누워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사탕 드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언젠가 친구가 우스개 소리로,
택시 기사가 주는 건 사탕은 물론 이고 음료수도 받아 마시지 말라고 한 적이 있었다.
먹여놓고 이상한 데로 데려간다고. 다 같이 웃고 넘어간 일인데,
어쩌다 한 번씩은 그 말이 떠올라 혼자 흠칫 놀라기도 했었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친절해 보이는 택시 기사가 준 사탕을 그냥 나는 손 안에 꼭 쥐고 있었다.
늦은 오후 쯤, 저녁을 먹으며 가볍게 반주를 걸치고 들어와 J에게 문자를 보냈었다.
늘 그렇듯이 술을 마시면 J에게 연락을 했고,
J도 그런 내 버릇 아닌 버릇을 이해하며 지내고 있었다.
'뭐해?'
'친구랑 영화 봐.'
화가 났다.
그리고 질투가 났다.
얼마 전, 회사 동기들과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J에게 '보고싶다'는 문자를 보낸 것이었다.
아무런 수식어 없이, 아무런 예고 없이, 아무런 오타 없이.
똑바로 쓰여진 네 글자, '보고싶다'
그 당시만큼은, 어쩌면 누구나 다 말하는 취중진담의 그 진담이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술 기운에 아주 작은 감정을 묘하게 뒤틀고 부풀려 거짓을 말한 건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J도 적잖이 당황했을 텐데,
내가 그의 그런 부분까지 신경 쓰고 배려할 만큼 여유로운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냥 내뱉고 질러버리면 그만인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다음 날 아침,
나는 또 다시 머리와 가슴을 치며 이놈의 술버릇을 고쳐버리겠다며 폰을 내동댕이쳤다.
덕분에 안 그래도 못난 폰은 고장이 나버렸고, 이 참에 잘됐다며 폰을 바꿔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어쩌면 그렇게 폰을 바꾸는 잠깐 동안에 J에게 연락이 왔을 수도 있다.
속은 좀 괜찮냐며, 출근 잘 했냐며, 그리고 조심스럽게 어제 한 말 뭐 였나며.
그러나 설령 그런 식의 연락이 왔다고 해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확인을 할 수 있었더라도, 나는 아무 말 없는 폰만 바라보고 있었겠지.
텅 빈, 아무 말 없는 폰을.
어영부영 그 일이 마무리 되어진 다음,
그 뒤로 J는 그런 분위기가 나온다 싶을 때마다 말을 돌리곤 했다.
처음부터 그런 기분을 느낀 건 아니었다.
어느 순간, 평소와 같은 농담을 내가 던질 때마다,
그는 교묘하게 그 말에 대한 반응을 피해가고 있었다.
그는, 그 날 눈치 챘다.
그리고, 오늘 뭐하냐는 내 질문에 평소와 같은 말투로 대답한 J.
그런 J에게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말을 그렇게 밖에 못 해?'
'왜? 뭐가?'
'됐다. 그만두자.'
'왜 화를 내는 거야?'
화를 낼만한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에게 내야할 화도 아니었다.
못나게 구는 나를 욕하고 꾸짖어야 할 일이었다.
"이 노래 누가 부른 건지 아세요?"
"네?"
J와의 일을 떠올리며 한참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던 내게 운전 기사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이 노래가 스페이스A라는 애들이 부른 건데요.
아, 누가 이 그룹에 여자가 그렇게 예쁘다 그래서 또 제가 찾아봤잖아요.
그래서 봤는데, 에이, 뭐 별로 더라구요. 하나도 안 예쁘던데요 뭐."
"아, 그래요?"
"여기에 코러스로 한 두어마디 노래 부르는 여자가 있었는데.
솔로도 냈어요. 이름이 '룰루' 라고. 쫄딱 망했죠."
나는 입술 끝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했다.
내 나이 스물 네 살, 90년대 중반부터 후반에 이르기까지가 바로 우리 세대가 아니던가.
한참 신나는 댄스곡과 그 가수들을 따라다니며 열광하던 나이.
스페이스A를 모르고, 설마하니 '룰루'를 모를까.
'아저씨, 룰루는 비데예요! 룰루가 아니라 루루예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꾸역꾸역 참았다.
사실, 쫄딱 망했다는 이야기가 더 해져 더 우습기도 했다.
운전 기사의 말을 빌리자면,
고작 코러스 두 마디 하던 애가 솔로 하겠답시고 나와 설치다가 쫄딱 망한 꼴이라니.
이건 상대방에 대한 배려일 수도 있고 위선일 수도 있었다.
알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는 것.
룰루가 아니라 루루라고 말하지 않는 것.
진심을 진심답게 말하지 않는 것.
행여 진실을 알려줬을 때,
상대방이 느끼게 될 민망함과 창피함, 또는 상처.
배려라고 그럴싸하게 포장된 마음의 속내는 사실 위선이라는 걸.
운전 기사가 계속해서 스페이스A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택시는 옥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주황 불빛이 가득한 뻥 뚫린 동굴에는,
나의 계획을 처참하게 무너뜨린 장대비도, 그 몹쓸 장대비 소리로 없었다.
자동으로 돌려놓은 와이퍼만 소리 없이 그리고 정신 없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마치 영화 '미스터&미세스 스미스'에서 최후의 결전을 앞둔 두 주인공이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미칠 듯한 적막감이 흐르는 공간.
적막감이 가득하던 그 공간을 지나 조금 달리자 동호대교가 나타났다.
어쩌다 아침 출근 시간에 퇴근하기라도 하면,
정신없이 오가는 차들과 함께 강 건너 환희 비추는 태양을 바라보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 만큼은, 날씨 덕분에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자욱한 안개가 서려있었다.
다만 저 멀리 다리 하나가 또 있다는 것쯤만 알 수 있었고,
세상 전체가 안개에 둘러싸여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한 번도 그런 꿈을 꾼 적이 없지만,
드라마의 영향을 받은 듯, 나는 이렇게 이른 새벽 안개가 껴 있는 모습을 보면, 꿈을 꾸는 듯 했다.
왠지 하얀 색 드레스 -절대 소복이 아니다. 드레스여야 한다- 를 입고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걷는 것이다.
꿈.결.처.럼.
꿈 같았다.
그렇게 말도 안 되게 J에게 화를 내버린 내 모습,
그리고 오랜만에 술에 취해 걸려온 옛 남자친구의 연락도,
이 시간 집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내 모습도. 다, 모두 다.
"비 오니까 집 앞에까지 가세요."
"들어가시기 힘드실텐데."
"아, 일방통행이에요?"
"네."
"괜찮아요. 이 시간에 차 별로 없어요."
"아, 네."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위선이라.
나는 끊임없이 운전 기사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는 척 하며,
적당히 맞장구를 쳐 줘가면서 그렇게 거의 집에 다 도착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운전 기사의 지나친 친절이 어색하고 낯설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쉴 새 없이 늘어놓는 이야기에,
아주 형식적으로, 그리고 웃으며 난 잘 모르겠으니 잘 아는 당신이 말해보라는 식의 거만한 태도로,
스페이스A의 그 솔로로 나와 망했다던 '룰루' 이야기를 들으며 집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그가 친히 건네 준 사탕은 아직도 내 손에 뜨겁게 담겨있었다.
한참동안 사탕을 만지작거리다가 마침내 사탕봉지를 뜯어 동그랗고 하얀 사탕을 입 안에 물었다.
내 손 안에서 한참이나 녹았던 사탕은 끈적끈적 하고 텁텁했다.
"아저씨. 그만둬야겠죠?"
"네? 뭘요?"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거요."
"뭘 아는데요?"
"그냥요.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건, 위선이죠."
"그치만, '위선자는 적어도 선(善)이 뭔지는 알고 있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거죠?"
"글쎄요. 전 잘 모르겠네요.
전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게, 거짓말보다 나쁘다고 생각하니까요.
뭐가 잘못 됐는지, 그러면 뭐가 옳은 건지,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모른 척 한다는 건, 상대방을 속이는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엔 자신을 속이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운전 기사는 눈가 가득한 주름을 보이며
뭐, 자긴 그렇다는 식의 표현으로 룸미러를 통해 나를 보며 웃었다.
나도 그를 마주보며 동의한다는 듯 웃었다.
사탕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에게도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J에게 짜증 아닌 짜증을 부린 것이고,
옛 남자친구 역시 괜한 술에 나를 떠올렸을 것이며,
내일 아침에 일어나 폰을 확인할 때 쯤이면,
내가 J에게 보고싶다는 말을 하고 난 다음 날처럼,
머리와 가슴을 몇 번 치고, 폰을 내동댕이 치며 후회할 것이다.
그리고는 또 시간이 흐르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것이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J가 마음을 눈치 채고 피하는 걸 알면서도,
끝끝내 이런 식으로 못나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나도,
좋아한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만큼 큰 감정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놈의 말이라는 게 하면 할수록 격해지는 것이라,
고민 아닌 고민을 상담하면서 한껏 부풀어 오른 감정이라,
이런 식으로 변질되어버리고, 또, 상대가 이런 식으로 밀어낼 줄은 생각도 못한 나도,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또 술을 마시면 아무렇지 않게 J에게 연락을 할 것이고,
그런 나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는 J의 몫이다.
변한 건 없다.
이 자욱한 안개가 걷히고 나면,
참을 수 없을 만큼 뜨거운 태양이 나를 내리쬘 것이고,
사람들은 오만상을 쓰며 태양을 욕하다가,
또 다시 언젠가는 그 빛과 볕을 만끽하며 고마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 변한 건 없다.
그리고 변할 것도 없다.
그래서 변할 것도 없다.
자욱한 안개가 걷히면, 정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에 안주하면서 그렇게 살아갈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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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오는 길,
우연히 택시 기사분과 나눈 이야기에,
집으로 오자마자 펜과 노트를 집어들었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지, 사실 모르겠지만,
가끔 이래요.
갑자기 막 쓰고 싶은 날.
오늘도 집으로 오면서, 어떻게 쓸까 내내 고민한 것 같네요.
간만에 칼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졸면서요.ㅋㅋ
아. 덥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