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사 계단을 내려간다. 홀가분 마음도 있고 섭섭한 마음도 있다. 마냥 가볍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할 줄 몰랐다. 벌써 이번 휴가도 내가 바라는 휴가가 되지 못할 걸란 걸 직감하고 있었다. 이 많은 동기들 중에 대부분은 두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군대 속에서 그래도 가장 편한 게 동기란 걸 새삼 느낀다. 이 곳과도 더 이상 인연이 없을 것이다. 외박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버스에 올라 타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동기들은 가슴에 박힌 주기표와 팔에 박힌 학교마크를 시원스럽게 뜯어낸다.
버스에서 내린다. 같은 분대였던 동기와 함께 역으로 간다. 역으로 들어서자 마자 일단 화장실로 갔다.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녀석과 인사도 못하고 버스터미널로 간다. 그 길에 동기들이 나에게 인사를 건냈다. 난 멋쩍게 답례했다. 동기로서 가벼운 포옹을 했다.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없기에 짧지만 뜨거운 인사가 필요했으리라.
지루하다. 해가 뉘엇뉘엇 저물고 있다. 내가 왜 버스를 택했는지 모르겠다. 지겨운 액션영화를 보며 나는 흘러간 옛 노래를 흥얼거린다. 지겨운 영화였지만 결정적인 장면 때마다 버스는 터널로 빠져드니 여간 감질나는 게 아니다. 시내의 밤은 향상 찬란하지만 뭔가 부족하다. 그것은 붐비는 인파속의 웃음이나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채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내 안에 있지만 난 그것을 지필 수 없다. 도화선은 물에 젖어도 탄다고 배웠지만 그건 도화선처럼 획기적이지 못한가 보다. 형을 만났다. 첫번째 휴가 이후로 처음 만난다. 형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둘도 없는 가족이다. 집으로 가는 동안 밤하늘을 볼 수 없게 만들 만큼 형은 나에게 정답게 대했다.
다음날은 잠만 잤다. 군대에서 못다한 잠을 휴가 때 마무리 짓는 건 상당히 미련한 짓이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난 자다 깨어도 다시 잔다. 티비도 재미가 없다. 얄팍한 유머에도 인자하게 웃을 수 있는 사회적 감각마저 나는 잃었다. 그건 치명적인 것이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친구를 만났다. 녀석은 나와 비슷한 성격에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차이는 군대를 갔느냐 대학을 갔느냐다. 끝까지 나에게 힘이 되어준다. 하지만 난 역시 어딘가 모르게 외롭다. 내가 유약하다는 건 다시금 느낀다. 겉으론 단단한 척 하지만 속은 깎아놓은 산처럼 부실하다.
사랑니를 뽑는다. 의사는 나 보고 뽑지마라 하고 나는 기필코 뽑아라 한다. 이번 녀석은 만만치 않다. 사랑니를 뽑기 수월하게 자르는 모양인지 타는 냄새가 역겹게 내 코를 쑤신다. 결국에는 사랑니가 날 떠났다. 나는 고통스럽다. 마취가 풀려서가 아니다. 그래, 솔직하게 말해서 새로운 곳에 적응한다는 것에 나는 엄청난 부담감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원인은 그게 다가 아닌 것 같다.
스물 한살. 어느덧 나는 내일의 새벽공기를 마시기 위해 잠자리에 들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