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가 하나 있어. 한 10년 넘게 방치되어 있는. 뭐, 주인은 보호라고 하겠지만 말이야. 베란다 한 쪽 구석에 덮개로 잘 싸여서 잠자고 있지.>
어김없이 찾아온 달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가 탈 줄 모르는 자전거 이야기다. 흠, 자전거 말고, 비행기나 선박 이야기면 더 나았을 텐데. 몰아보고 싶다는 꿈도 꾸지 못하게 말이야. 그래도 대화는 지속되어야 하니까 관심을 기울여본다.
( 그 자전거가 거리를 달리고 싶대?)
뭐, 뻔한 이야기잖아. 갇혀있는 것은 무조건 현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니까.
<뭐,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얘도 좀 삐딱선 타는 녀석이라. >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그, 램프에 갇혀 있다가 자신을 구해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원한만을 가득 갖게 된 마법사 같은?)
기억나지 않는가. 어릴 때 읽었던 동화책. 자신을 구해주는 사람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해 주겠다고 마음 먹었으나 백 년 이백 년 흐르는 동안 원망하는 마음만 켜켜히 쌓여서 결국 수 백 년이 더 흐른 후에 자신을 구해내는 사람은 무조건 불행하게 만들어버리겠다고 이를 복복 갈았던 그 삐딱 마법사.
<아니, 이 자전거는 마법 같은 건 쓸 줄 몰라. 자전거는 자신이 거리를 달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못 하지만, 만약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아마 거리로 나서고 싶어하지 않을거야.>
(자전거의 섭리 아냐? 거리를 달리는 거 말이야. 땅과 친밀하고, 바람과 이야기 하고, 가끔 거리의 나무들에게 곁눈질 하고. )
<이 자전거는 베란다 한 쪽 구석에 익숙해져 버렸어. 그 환경이 굳은 살처럼 자신에게 박혀 버린 듯해. 자전거 녀석은 바퀴에 바람이 빠진 것을 슬퍼하고 있을 뿐이야.>
(십 년 넘게 안 탔으면 당연한 거 아냐? 하지만 거리를 달릴 것도 아닌데, 왜 바람빠진 바퀴를 신경 써?)
<달릴 수 있는데 안 달리는 것과 달릴 수 없다는 건 엄청난 차이라는 거지.>
하, 주인에게 수고롭겠지만 결코 타지 않을 자전거를 들고, 바퀴를 갈기 위해 자전거 전문점으로 뛰라고 말해야 한다는 건가?
(마음은 알겠는데, 상당히 비효율적인 자전거네.)
<외부에서 보면 그렇겠지만 실제는 아니야. 나 자신의 문제가 되면, 더 이상 울리지 않는 삑삑 소리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 장식도, 탄탄하지 않은 바퀴도 다 서글픈 거야.>
자신의 문제가 되면. 그러게. 이 말에 공감하게 되네. 내가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은 적어도 자신에게 만큼은 불가피한 이유가 있는 거니까 말이야.
(바퀴를 갈고 싶어하는, 달리지는 않을, 자전거. 아직, 그 베란다에 있겠지?)
<앞으로도 몇 년 이상은 그곳에 있을거야. 주인이 이사갈 생각은 않는 것 같고, 자전거는 붙박이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아, 스스로는 어떤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자전거. 누군가 도움을 주지 않으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겠구나.
그런데, 우리는 베란다 한 켠의 자전거도 아닌데, 왜, 자신의 세계 속에 담겨 있으려고만 하는 걸까. 익숙해서? 불편함이 없어서? 굴러가지 않아도 이내 시간 속에서 마모되어 갈 것임을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게 된, 너무 많은 경험치. 그게 서글픈 저녁이다.
(이봐, 달. 노래 한 곡 불러봐. 우울하니까.)
<달 노래는 네 귀에 안 들려. 지금도 배경음악으로 쫙 깔고 있는데, 네가 모르잖아. >
달이 노래를 들려주는 저녁이라는 거군. 매일매일이. 단지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을 뿐. 왠지 , 늘 뭔가 소란스러운 느낌이더라. 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