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것은 달이 밝아서도 아니고, 바람이 서늘해서도 아니다. 잠을 이루지 못 하는 나 자신을 스스로 용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면의 밤에 익숙해짐을 넘어 즐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깊은 밤, 잠을 이루지 않고 있는 아이에게 달님이 이야기를 들려주던 동화를 지은 이는 안데르센이었던가 그림형제였던가. 뭐, 이제와서는 그걸 누가 지었든 무슨 상관이랴. 그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혹은 굳이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은 먼 나라의 오래 전 사람들이고, 내가 빌려오고 싶은 것은 달이 전해주는 이야기일 뿐인 것을. 게다가 이렇게 정직하게 '차용'을 밝히는데, 저작권 침해를 들고 나올만큼 속 좁은 위인들로도 보이지 않으니 pass.
추운 날이라 베란다 창을 열고 달이 나왔나 숨었나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달은 안 보여도 거기 있는 거니까 지금 바깥 하늘이 어떤지와 관계 없이 커튼 너머의 달이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고 가정하기로 한다.
밤보다 새벽에 좀 더 가까운 시간, 조용한 방에 전화벨이 울린다.
"아직 안 자?"
먼 곳에 사는 친구다. 적어도 심심하다고 해서 당장 달려가 놀아달라고 조를 수는 없는 곳에 사는 친구.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에 있는 친구. 시차가 있어 나의 새벽이 그 친구에게는 저녁인 친구.
"어. 몇 시야?"
"여긴 10시. "
"아, 10시. 여긴 새벽일 거야."
수화기 저편에서 지척인 듯 말을 하는 이. 기술의 발달이 경이로울 뿐이다. 그 녀석도 나도 지나치게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니, 정해진 계획대로 살지 않아도 되는 현재의 상태를 감사히 여겨야 하는 거다. 불면을 즐기는 것도 '여유'를 허락 받은 자들의 놀이.
수다스러운 새벽을 - 그쪽은 저녁 - 지나, 이제 달이 들어가려는 시간에 통화가 끝난다.
<매일 같이 무슨 할 얘기들이 그렇게 많아?>
오늘도 달이 말을 건넨다.
(얘기가 많은 게 아니라,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는거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에게 대화 상대는 드물잖아. )
달빛의 파장이 내 방에 머문다. 언제부터였던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달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난 너의 수호성이야. 그러니 헛된 마음속을 헤매는 너에게 잡다한 마음 하나를 더 보태주지. 네 어지러운 마음을 얘기하면, 그 어지러움에 번거로움을 보태줄 예정이야. 그 혼돈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 물론, 네가 원한다면 말이야. 원치 않으면 혼돈을 즐기는 것도 괜찮아. 삶의 길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니까.>
내가 원하는 형태의 cool한 달이 내게 말을 걸어 내 불면을 부채질하고 있다.
(사람은 타인을 통해 혹은 나 외의 다른 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 그런데, 우리에겐 특히 나에겐 그런게 드물어. 난 고립되어 있잖아. 내가 만들었든, 강제되었든, 난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대상이 필요해. 그래서 수다가 길어져.)
달빛이 옅어지고 있다. 그도 순례길에 오를 시간이다.
<네 사변적 성격에 어지럽다. 내일, 너의 통화가 일찍 끝나면 내가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줄게. >
그렇게 나의 달이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날들이 이어질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