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를 데리고 돌아온 나의 세상은 1Q84 따위는 아니다. 여우 역시 리틀피플이 자아내는 실타래 더미 속의 또 다른 나 따위는 아니다. 여우는 나와 별개의 존재이며, 연관성은 없다. 내 세상의 달은 둘이 아니다. 굳이 하나일 필요도 없지만 어거지로 꾸며낸 잡스러운 동화 같은 두 개의 달이 뜬 세상 같은 것은 아닌 것이다. 달이 하나든 둘이든 셋이든 혹은 수만 개이든 상관없다. 눈에 보이는 달의 개수와 관계없이 나의 세상은 하나이다.
여우에게 말을 걸어본다.
'네 동화 속 세상으로 돌아가도 되지만, 여기 머물러도 괜찮아.'
바스락거리는 포도넝쿨 아래에 나와 여우와 그리고 나의 그림자와 여우의 그림자와 그리고 이따금 향긋거리는 포도송이들과 그렇게 단촐한 몇몇 생명이 있다.
'여긴 사냥꾼이 없네. 무척 평화로운 곳이구나.'
'어, 그래. 내가 사냥꾼을 만들지 않았거든.'
'그럼 변화 따위도 존재하지 않겠네.'
여우는 포도를 따서 한 입 먹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 포도 참 달콤하다. 그런데,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아. 난 포도 보다는 역시 닭이 좋아. 닭장 근처에는 사냥꾼이 있지만 역시 난 닭이 좋아. 포도가 아니라.'
여우의 그림자가 네 발을 쭉 뻗는다. 그리고 자신의 여우를 이끌고 닭이 있고 사냥꾼이 있는 자신의 세상으로 가 버린다. 아, 그건 좀 가슴 허해지는 경험이다.
다시 포도넝쿨 아래에서 시간이 흘러간다. 무한대의 내 세상에서 내가 등장하는 곳은 이 어둑하고 좁은 포도넝쿨 아래 뿐이다. 닭도 없고, 사냥꾼도 없고, 리틀피플도 없고, 달처럼 부푼 실타래 속의 나와 같은 내가 아닌 존재도 없고, 그래서 이건 아무래도 미안해지는 일이다. 내 세상에 나와 포도넝쿨만 등장한다는 것은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네버랜드는 피터팬 때문에 움직인다. 그가 없다면 네버랜드는 아무것도 아니다. 악어도, 후크 선장도, 팅커벨도 웬디와 아이들도 인디언도 모두 피터팬 세상의 등장인물이다. 그들에게 피터팬은 행동하는 의미이다. 아, 나도 내 세상에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들에게 행동하는 의미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바스락거리며 포도넝쿨을 벗어나 본다. 난 사실 포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살아 숨쉬는 듯한 향기는 좋지만 먹을거리로서의 포도는 나에게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여우처럼 닭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닭은 나에게 그저 좀 재미있게 생긴 생명체일 뿐이다.
내 세상에 들판이 펼쳐져 있다. 푸르다. 온갖 생명이 풀 숲에서 생활하고 있다. 살아있는 냄새에 어지러워진다. 너무 많은 산 것의 냄새들이다. 내 생명의 세포들이 눈부셔한다. 들판을 가로질러 개울이 흐른다. 아무리봐도 1급수이다. 아, 이런. 역시 내 세상의 물은 1급수다. 여기에는 결코 상어가 살 수 없겠구나. 꽁치도, 고등어도, 가오리도, 불가사리도. 역시 그러하군.
나는 피라미다. 1급수를 벗어나서는 살 수가 없다. 나는 상어가 되고 싶은데, 현실의 나는 피라미다. 이 맑디맑은 개울을 벗어날 수가 없다. 흐린 환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온다. 이 들판과 개울을 벗어난 다른 세계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아, 그래. 난 피라미다. 닭이 있는 자신의 세상으로 가버린 여우가 부러워진다. 그는 닭과 함께 사냥꾼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아, 난 상어가 되고 싶은데, 내가 상어가 되려면 무엇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내 그림자는 피라미이다. 그래서 개울을 나오지 못한다. 평화롭고 아름답지만 그게 다다. 죽은 듯 개울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어느새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그러면 내 그림자는 상어가 되어 있을까.
'아니. 넌 상어가 될 수 없어. 넌 그 개울의 피라미도 아니야. 네가 보고 있는건 네 그림자가 아니야. 넌 지금 한 마리 여우야. 시력이 나쁜.'
개울 건너에서 느긋하게 물을 먹고 있던 사슴 한 마리가 말을 한다. 경계하는 눈빛인데, 그래도 말을 하고 있다.
'넌 참으로 좁은 네 세상에 갇혀 있구나. 넌 여우야. 아무리 봐도 넌 여우야. 스스로 피라미라고 우기고 싶은거야? 하지만, 피라미보다는 여우가 상어와 더 가까워질 가능성이 커. 피라미는 바다로 갈 수 없지만, 여우 너는 갈 수 있거든.'
사슴의 말이 좀 이상하다.
'이봐, 난 상어를 만나고 싶은 게 아니야. 난 상어가 되고 싶은 거야. 상어는 어류야. 피라미도. 하지만 여우는 포유류야. 종 자체가 달라. '
내 이야기를 듣던 사슴이 풀숲에 여유롭게 엎드리더니 말을 잇는다.
'그래? 왜 상어가 되고 싶은데? 상어만이 할 수 있는 어떤 일이리도 있는거야?'
'상어는 적어도 치열하게 살 것 같아서 말이야. 나에게 치열한 생존의식이 부족하거든.'
사슴이 '쳇'거리면서 말을 이어간다.
'상어만 치열하게 사는 건 아니야. 피라미도 그래. 단지 겉에서 보기에 강해보이지 않을 뿐이지. 넌 강해보이고 싶은건 아니니?'
아, 그런가? 난 단지 '세'보이고 싶은 건가? 나의 세상에서 여우로 보이는 나는, 결코 피라미는 아닌 것으로 보이는 나는 강해보이고 싶어서 상어를 꿈꾸었던가. 나는 개울을 건너 사슴 곁으로 가 보았다. 그에게 더 많은 것을 묻고 싶어서. 하지만 내 세상 속의 사슴이었던 존재는 자신의 그림자를 이끌고 숲 멀리로 가 버렸다.
'넌 이미 내게서 듣고 싶은 말은 다 들은 거야. 더 이상은 말의 낭비가 되는 거지. 너도 알고 있잖아. 말이란 언제, 어디서,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내 역할은 여기까지야.'
그렇게 사슴이 사라지고, 아직도 여우인 나는 이미 건넌 개울을 등지고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