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동그래서 슬퍼.´
열일곱 그녀는 참 예뻤다.
열일곱 또래의 소녀가 보기에도 햇살 쏟아져내리는 가슴이 환해질만큼.
졸릴 때마다 다홍색 체육복을 뒤집어쓰고 발갛게 상기된 볼 안에는 늘 츄파츕스 레몬맛 사탕이.
물결이 일렁이듯 부드러운 연한 갈색 머리칼속에 숨어있다가 가끔 모습을 드러내는 붉게 물든 머리카락.
나는 지는 놀의 쓸쓸함을 닮은 그녀의 빨간색을 좋아했었지, 그 어떤것보다도.
누군가 그녀를 가죽장갑이 어울리는 여자라고 그랬다.
나는 곰돌이가 그려진 샛노란 벙어리장갑. 너는 매끄러운 가죽장갑.
아,그리고 하나더. 교복의 티 하나 없는 새하얗고 빳빳한 카라가.
여고생이라는 가슴 벅찬 말이 누구보다도 참 잘 어울리는 사람.
언제부터인가 나는 오래전부터 손을 잡는 것에 길들여진 사람이 아니면 좀처럼 손을 잡으려하질 않는 편이었다.
왜냐고 물어온다해도 할 말이 없어. 땀이 나도록 오랫동안 꼭 마주잡고 있던 두손을 놓을 때 교차하는 어색함이 싫어서-
라고는 아마 죽었다 깨어난다 해도 말 못할거야.
어느 잊을 수 없는 봄날 처음으로 마주잡은 그녀의 손은 그런 결핍적인 두려움을 단번에 가시게 해주었다.
그저 울음이 터져나올만큼의 따스함. 통통하고 짤막한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싸쥐는 가녀린 두 손.
철없는 꼬마아이의 그 것처럼 영원히 놓고 싶지않다는 말도안되는 고집을 부리고싶을만큼.
그녀는 유난히 잠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니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너는 내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긴장감에 다리가 꼿꼿이 서고 가빠지는 호흡을 애써 억눌러내리는 그 순간조차
무심한 너는 졸음에 겨워 천진난만하게 생글생글.
그녀는 종종 피아노를 치곤 했는데 어떤 악보든 쉽게 소화해낼만큼 잘 쳤다기보단
그저 건반에 그녀의 손가락이 닿는 것만으로도 참 '멋'이 나는,
그녀의 음악이 울리는 '세계'는 춤을 추듯 우아하고 아름답게 비틀리는 느낌.
그녀의 피아노 반주에는 마음으로 들어야만 닿을 수 있는 무엇이 있었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눈이부시리만큼 아름다운 젊음의 싱그런 푸르름.
태초에 하늘이 쏟아지는 빛줄기를 통해 열리고 땅의 심장이 요란스럽게 고동치며
녹색 거품이 일렁이는 바다물결이 이 끝과 저 끝을 향해서 달아나고 해체됨을
눈앞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잊은 줄 알았던 기적같은 설레임.
의식의 끈을 잃고 일순간 혼미해질만큼의 아찔함.
피아노 반주와 함께 들려오는 노래가사 속에 숨어있는 애절한 고백의 미묘한 떨림.
어느 여름날 창문을 녹여버릴듯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의 뜨거운 잔영.
열일곱 소녀의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었던 유월의 녹음, 그 속의 눈물날만큼의 황홀함.
그리고, 내 유년시절 피아노 콩쿨대회를 앞두고 불가피한 일로 꿈을 접어야했던
아홉살 꼬마가 경험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웠던 이루다 말할 수 없었던 슬픔까지도. 그 모든 것이 응어리져 녹아있었다.
교실 제일 뒷줄의 뒷문 바로 옆 그녀의 자리 그리고 그와 정대각선을 이루고 있는 오른쪽 창가 두번째줄 내자리.
내가 뒤를 돌아보다 종종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가볍게 내뱉어진 숨소리 하나 속눈썹의 미세한 떨림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서로가 서로를 굳은 표정으로 오랫동안 뚫어져라 바라보곤 했다.
그 순간 나를 에워싸고 돌아가고 있던 세상의 톱니바퀴가 순리대로 굴러가는 것을 거부한다.
그 순간만큼은 감히 세상의 중심에 단둘이 서있는 느낌이었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둘만이 아무도 모르게 누리곤 했던, 공유했던 지상의 낙원. 파라다이스.
기쁘지만 울고 싶었고 목이 메었지만 가슴이 벅찼다.
깨뜨리고 싶지 않았기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영원히 그 순간 그대로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었다.
입밖에 내뱉는 순간 축제가 끝나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에.
보고싶지 않은 부분앞에서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으로 눈을 가리고 귀를 닫고 몸을 숨기고
오래도록 끝나지 않을 것같은 달콤하면서도 한켠으론 씁쓸한 꿈을 꾸었다.
그녀는 내가 기쁠 때나, 아플 때나 질투가 날 때나, 눈물이 날 것 같이 외로울 때나
늘 예기치 못한 선물을 가져다주는 그런 사람이었지.
함께한 모든 순간들이 선물 받은 느낌이었어.
그녀 앞에서 나는 늘. 제대로 끌어안지도 못할만큼의ㅡ제 덩치보다 커다랗게 포장된ㅡ선물을 받고는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하며 발그레하게 상기된 볼가엔
기분 좋은 웃음이 한가득 맺혀있는 철없이 순수한 꼬마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스치는 눈길 하나 손짓 하나, 웃음 하나 모두다 지울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그런 사람.
나는 그저 싱긋 웃으며 손흔들고는 안녕- 이 말이 참 하고 싶었는데.
그리고,비록 닿지 않을 말일지라도 참 많이 고마웠다고.
언젠가 애틋하게 남을, 한없이 앳되고 미숙하기만 했던 열일곱의 기억의 한자락속에
네가 있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사하고 있다고.
앞으로는 아마 영원히 추억을 곱씹으며 되새기며 그렇게 살아가겠지.
너무나 바보같지만.
셀 수 없는 시간이 흐른다해도 나는 계속 열일곱에 머물러있을 것만 같아.
2005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