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에 상처를 안고 동시에 아무도 모르는 보물을 땅속에 파묻다.’
언젠가. 유난히 눈물이 많고 마음이 여렸던 열다섯의 어느 겨울날.
난생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눈물로 얼룩진 진심을 조심스럽게 꺼내어보였는데
부릅뜬 눈 앞에서 아주 보기좋게 짓밟히는 걸 보아야만 하는
지독한 형벌 앞에서. 심장을 구타당하는 고통 앞에 무기력하게 주저앉으며
터져나오는 울음을 꾹 참고 입술을 깨물고
전 날의 어떤 스쳐지나가는 대화속에서 상대방이 했던 말을 떠올렸어.
못살겠다 어쩐다. 해도 인생은 결국 그런 거 아닌가.
너무 나약해서 서로 돕고 도우면서
그렇게 서로의 작은 어깨에 기대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내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내뱉듯이 들릴듯말듯 작게 읊조렸을 때
그가 냉소를 띄고 말했었지.
돕고 도우며라
밟고 짓밟히고. 라는 뜻으로 들리는데.
억양이 없는 그 차가운 목소리를 떠올렸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
그 순간 뇌리를 차갑게 엄습하는 이유 모를 억울함. 분노.
깨문 입술에 피가 배어날만큼 너무 분한데,
그게 아니라고. 당신 말이 틀린거라고,똑부러지게 말할 수 있기는 커녕
입안에서 목구멍을 녹여버릴듯한 뜨거운 온도로 쉴새없이 흘러드는 눈물을.
그 불순물 덩어리를 제대로 삼킬 수조차 없었다.
단 하룻밤 사이에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180도 변할 수도 있구나.
그때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모욕감과 수치감에 눈물을 흘리며 가슴깊이 새겼어.
사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상처받고 싶지않았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존재하고
어쩌면 돌이킬 수 없음은 물론,영영 치유되지 않을지 모를 아픔과 상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여러번 상처입은 일방적인 마음은 결국 그저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게 다였던
순수한 본래의 의도마저 치욕스럽고 욕되게 만들어버리는
증오와 집착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만다는 사실.
일찍 깨닫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어. 아니,차라리 영영 모르고 싶다고.
나는 그저 모두 행복해지길 바랄 뿐이었는데.
그렇지만. 결국 인간이란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상처받을 수 밖에 없는,
그건 그 누구도 감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버리고 난 후에도.
우습게도. 여전히 실낱같은 희망이랄까- 하는 것은 버릴 수가 없었지만.
인간은 각자 가엾고 나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으니까 당연하잖아.
다 알고 있음에도,말하자면 불행 중 다행 그런 것이랄까.
그렇게 보는 세상은.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아프고 괴로울 뿐이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으니까.
마음 속에 조그맣게 비워두었어.
본래의 더럽혀지지 않은 마음이 있는 공간.
힘들고 지쳐서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을 때 열어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지친 몸도 마음도 지탱해줄 수 있는 뿌리깊은 나무가 있는 조그만 공간.
결국 마지막에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이어야 하니까.
하지만 분명하게 말해두고 싶은 건
2년이라는 어찌보면 결코 짧다할 수 없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상처가 성숙이라는 값진 열매를 영글게 한다는 말 같은 건 인정하지 않아」라고.
어떤 상처는 너무나 아파서,떠올리고 싶지 조차 않지만.
설사 감히 떠올릴 수 있을만큼 무뎌졌다 할지라도 상처 딱지 하나만 봐도 금방 눈물부터 나는걸.
아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
잊고 싶은데,이제 그만 과거의 잔상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질않아.
그래서 영원히 '상처'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거라고.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이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당신에게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는 건.
눈물을 멈추게 할 순 없을지라도
따뜻한 눈으로 조용히 지켜봐주는 것.
열다섯,그 때의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었어.
벼랑 가장자리에서 누군가 넘어지려고 하면 그들을 잡아주는.
2005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