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학교 1학년 때의 일로 기억한다.
동네에 가게라고는 딱 하나...
그나마 그것도 가게문을 여닫는 시간이 주인 마음인 시절...
약방이 있을리 만무하다.
약방이라고 해봐야 옆 마을에 돌팔이 약사가 운영하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
내가 저수지에서 수영하다가 농약유리병 파편에 베어
오른쪽 엄지 발가락이 달랑 거린 것을
마취도 않고 꿰매었으니 분명 내 기억에는 돌팔이가 틀림이 없거나
마취제가 없는 시절이었다.
지금도 그 상처는 돌팔이의 기억을 새록새록 자라나게 한다.
동네사람들이 그 약사를 가리켜 분명 돌팔이라고 말한 것을 들은 기억이 있다.
소화제를 사러 간 기억은 확실하지 않으나
옆 마을 돌팔이 약국에서 돌아서 나오는데,
저쪽에서 그녀석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손바닥에다 사탕 서너 개를 얹어 주었다.
지금까지도 그녀석의 행동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분명
사탕이 귀한 시절이었거나, 우리집이 무척 가난했거나...
아니면 둘 다 해당되었거나 일 것이다.
그녀석과 나는 그닥 친한 사이가 아니고, 돌발적인 상황이라서
난 멍하니 그녀석이 하는 행동을 넋놓고 바라보다가 그녀석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난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후 그녀석과 나는 같은 반이 된 적이 있었고,
할아버지, 할머니 하고만 생활한 그녀석의 생활도 그닥 좋은 편은
못되어서인지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교무실에서 자주 만난 기억이 있다.
그시절의 담임 선생은 장미라는 담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끽연가여서
학생들에게 담배 심부름을 자주 시킨 훌륭한 선생이었다.
내 기억에 선생들은 전부 도둑놈이었고, 하나같이 안 좋은 기억밖에 없는
선생들이었다.
육성회비 늦게 납부한다고 무안당하고, 못난 소리 듣고, 두들겨 맞았으니
선생이 좋은 기억으로 남을리 만무하다.
60여 가구밖에 없는 우리 마을에는 선생이 세분인가 네분이나 되었었다.
그 중 한 분은 교감선생이었고, 나중에는 교장선생님이 되기도 했지만
동네 사람들의 평판은 형편없었다.
내 기억으로 우리집이 그 잘난 교장선생의 전답을 빌어먹은 것으로 알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선생님 중에서 지금도 한 번은 꼭 만나뵙고 싶은 선생님이 계시기는 하다.
중 1때의 국어 담임선생님 이셨는데, 당시 젊었던 만큼 의욕도 대단했고
선생이라는 직분에 충실했고, 인정이 꽤나있으셨고,
가난을 누구보다고 마음아파 하셨던 분인걸로 기억한다.
-중학교 졸업식날 무슨 일인지는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교무실을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 선생님의
자리가 맨 끝자리여서 인사를 드리고 얼굴이 마주쳤는데, 그 측은해 하는
눈빛을 난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중학 졸업 후 나는 서울로 공장생활을 하러 떠나서 그녀석의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내 기억의 그녀석은 삐쩍마른 체구였고, 키는 작지 않았다.
공부 잘하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는 지금까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공부는 조금 잘한 편이었고, 웅변을 잘했다.
나중에 들은 소식으로는 대학교 때 만난 여성과 결혼했고
그 여성의 도움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했다.
서너 해 전까지도 서울 신림동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 후로는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노화도의 유일한 출세 인물, 삼성 장군 출신의 천용택 의원 이후로
걸출한? 인물이 출현하지 않은 것을 보면 필시 미역국을 열심히 먹고 있거나
다른 길로 돌아섰을 것이다.
사탕 서너 개로도 수 백타를 넘길 수 있는 것을 보면
사탕은 그냥 입에서 녹아 내리는 존재를 떠나 기억을 녹아 내리는
마력이 있는가 보다.
아무튼 그녀석의 앞날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길 빌어본다.
그녀석을 생각하면 동시에 떠오르는 다른 녀석이 하나 있는데
그녀석도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