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왕자님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에요..언제나 당신의 뒤에서 바라만 보던 제게 단 한번도 시선을 두지 않으셨던 나의 왕자님..오늘의 달이 잠들면... 왕자님의 뒤에서조차 볼 수가 없답니다..처음부터 왕자님은 저의 존재를 모르셨으니...서운해하지 않으실 거죠? 앞으로는 안개 여인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시게 되겠죠.. 제가 아닌 그녀가 왕자님을 지켜주겠죠..돌아서야 하는 제 맘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마지막이 될 이 시간, 듣지 못하시는 왕자님의 마음에 대고, 이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할래요....그렇게 할래요.... 제가 쌓아놓았던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다 쏟아내고 떠날래요...듣지 못하는 당신의 가슴에 대고...들려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 마음 아프지만..어쩔 수 없잖아요...그렇게 라도 전하고 싶은 걸요...'
주루룩--주루룩---왜 그리 눈물은 많은지...계속 흘러나오기만 했습니다.
소녀는 평생 흘려야 할 눈물을 그날... 다 쏟아놓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소녀는 마치 깨어있는 왕자님을 대하기라도 하듯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어둠의 성에서 구해준 소녀를 기억하시나요? 그 소녀가 바로 저랍니다. 어둠에 빠져 있던 제게 빛의 세계를 알게 해 주신 왕자님을 찾아 머나먼 여행길에 올랐었죠.. 한 번이라도 저를 알아봐 주길 바랬었지만, 왕자님은 절 몰라 보셨어요...그래도 전 왕자님이 좋았답니다.
너무나 많이 왕자님을 좋아했답니다. 제가 얼마나 왕자님을 그리워하고 좋아하는지 왕자님은 모르실 거예요..세상의 전부를 다 준다해도 왕자님하고는 바꿀 수 없을 만큼 왕자님이 좋았어요..."
왕자님은 자면서 "그래..그래..." 대답을 했지요..
마치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요...
아마도 왕자님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안개여인이 자신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왕자님, 날이 새면 이곳을 떠나세요... 절망은 왕자님의 몫이 아니에요. .절대로 절망에 뿌리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그분도 왕자님이 절망에 발을 들여놓는 걸 원치 않으실 거예요. 절망은 꿈을 꿀수 없게 하고 허무를 느끼게 하죠.. 제가 어둠에 중독 될 당시 처음으로 찾아왔던 것이 바로 절망이었어요. 왕자님....아시잖아요.. 처음 제 모습이 어땠었는지...아시잖아요..단지 왕자님이 기억을 못하실 뿐....그러니, 빛의 왕자님은 절대로 절망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돼요... 당신은 언제나 빛의 사람으로 있어야 해요."
소녀의 목소리는 점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목이 메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분께서도 절망 속에 머무르고 계신 왕자님의 모습을 원치 않으실 거예요. 저 역시 왕자님이 이곳에 머무는걸..정말 원치 않아요... 만약...만에 하나라도..그분께서 또다시 왕자님 곁을 떠나신다면...그래서 다시 왕자님이 그분을 찾아 떠도는 일이 생긴다면....절망의 나라만은 피해 주세요...다음 번에 그분이 계실 곳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일 겁니다..그분 역시 자신을 절망 속에 내던져 두는 일은.. 하지 않으실 거니까요.."
"...그래..그래.."
"당신은 빛의 사람.. 이었어요. 그 사실을 잊지 마세요...빛의 왕자님. 당신의 그림자처럼 어두운 세상엔 눈길도 돌리지 말아요..왕자님, 당신은 또 다른 형제인 그림자에도 눈길을 돌리시지 않으시던 분이셨어요..다시는 운명을 거스르는 일은 하지 말아요..빛의 사람인 당신이 그림자보다 더한 절망에 발을 들여놓으신 건 잘못 하신 거예요.....이제, 원하시던 그분을 찾게 되었으니, 다시 예전의 빛나던 왕자님으로 돌아가는 거예요..그렇게 할거죠? 그래 주시는 거죠? "
"그래..그래..다시는 절망에 뿌리를 내리지 않을 거요..당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소녀는 눈물이 앞을 가려 왕자님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대요.
"왕자님....저를 잊으실 건가요? 안개 여인의 존재에 가려져..그렇게 잊혀져 가야 하는 건가요? 왕자님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그것이 진정 저의 운명이란 말입니까... 그래도 상관없어요...제가 지워지고, 그곳에 그녀가 자리를 잡아도..상관없어요.. 왕자님만 행복하시다면요.."
"...음...음..."
왕자님은 고통스러운 듯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뒤척였습니다.
소녀는 왕자가 평정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지요...
"왕자님의 무도회가 열릴 때마다 장막 뒤에 숨어서 왕자님을 내려다보곤 했었죠.. 왕자님은 참으로 멋지셨어요. 화사한 미소와 함께 아가씨들과 춤을 추는 왕자님을 보면서 즐거움에 웃음 짓곤 했어요... 그러다가도 그녀들에게로 향한 미소가 내게로 오지 않는다는 생각에.. 한숨 짓기도 했지요..세상이 꺼져 버릴 듯한 깊은 한숨이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곤 했었죠...
그래도 그때가 행복했어요.. 항상...왕자님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요.."
왕자님은 무도회를 회상하는 듯한 모습으로 잠에 취한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대요.
"그래..그랬었지..난 늘 나를 지켜보는 고요한 눈동자를 느낄 수 있었지.. 바로 무도회를 열었을 그 즈음..말이야. 오! 바로 안개여인, 그대를 처음 알게 된 무도회의 밤을....잊지 않고 있어..늘, 그대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지..고요한 자태에..보일 듯 보일 듯 드러내지 않는 당신의 모습에 애달파 하며..마음에도 없는 아가씨들과 춤을 추던 때가 기억나오. 그대의 웃음소리를 듣기 위해...난 즐거운 듯 웃으며 춤을 추어야 했단 말이오...당신은 그걸 몰랐지?"
소녀는 조심스레 왕자님의 얼굴을 어루만졌답니다.
쌔근쌔근 고른 숨을 쉬고 있는 왕자님은 행복에 겨운 듯 아주 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요...
덜덜 떨고있는, 소녀의 가녀린 손은 왕자님의 뺨 위를 떠날 줄 몰랐습니다.
"그래요..그랬었군요..저만 모르고 있었군요...그래요..그랬던 거예요... 왕자님은 항상 그분만을 생각하셨죠..왕자님의 환한 미소는 그분을 위한 미소였던 거였군요..전..그 미소를 보며, 웃음 짓곤 했었는데. 알고는 있었어요.. 저를 위한 미소가 아니라는 것을요..그래도 당신이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참으로 행복했답니다..그 미소를 보기 위해 매일 밤, 무도회를 찾았던 거죠. 왕자님, 모르셨죠?"
"........ ........... "
"기억할지 모르시겠지만, 무도회의 장막 뒤에서, 단 한번 왕자님의 눈을 바라본적이 있었어요.. 왕자님이 장막 뒤로 시선을 두실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그땐 어찌나 놀랐던지,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 나왔던 기억이 나네요..경이로움에 찬 왕자님의 그 눈빛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어요...왕자님의 그 눈빛을 받던 날, 심장이 하도 뛰어대는 통에 그날은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 했었죠... 그래도 그때가 행복했어요... 언제나 왕자님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요.."
왕자님은 만면에 환한 웃음까지 띄우며 소녀의 말에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그랬었지...당신은 늘 침묵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단 말이야..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겠지만... 난 다 알고 있었단 말이야..그대의 소리 없는 시선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단 것을 몰랐단 말이오? 그런 그대에게로 향하는 내 불같은 열정을 진정 몰랐단 말이오? 그대는 진정 바보 같은 사람이구려..언제나 그대에게로 향했던 내 맘을 몰랐단 말이오?"
소녀는 소리 없이 흐느끼면서 왕자님의 뺨을 자꾸만 쓸어 내렸습니다.
"아~~왕자님...아직도 그녀만 생각하고 계시는군요...당신이 느끼신다는 그분의 존재를 그때나 지금이나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분을 만나 뵙고 싶은데..그래서 왕자님이 그분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들려드리고 싶은데...그래서 왕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데..저는 알 수가 없어요..이렇듯 왕자님은 꿈속에서조차도 그녀를 그리고, 또 느끼고 계신데....전..그분의 존재를 느낄 수가 없단 말이예요..."
"그래..그래...그대의 존재를 느끼는 건 너무 어려웠지...워낙에 소리 없이 나타났다가..사라지는 당신이었으니까. 그대의 한숨소리..그대의 웃음소리를 듣기 위해, 그대의 존재를 느끼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했었는지 알기나 하오?....다른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지...언제나 내 몸과 마음은 그대에게로 열려 있었단 말이오..미약한 그대의 존재를 그럼에도 느낄 수 있었던 건....오직 당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단 말이오..그걸 모른단 말이오?... 정말 몰랐단 말이오?"
"..왕자님이 좋아요...너무 좋아요..이렇게 곁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걸요..나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없을지언정... 당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였지요. 그녀만을 생각하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지켜보면서도....당신을 좋아하는 제 마음은 변함이 없었어요...당신이 그녀를 생각하는 만큼, 당신을 생각하는 제 마음도 변하지 않았는걸요. 아.....왕자님이 좋아요...너무 좋아서..당신을 떨칠 수가 없어요..."
왕자님은 꿈에 취한 듯 자신의 뺨에 올려져 있는, 소녀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쥐면서 말했습니다.
"그래..그래..나역시 그대를..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은걸...그대의 존재만으로도 난..행복하단 말이오...무도회가 열리던 날..난, 늘 먼 발치에서 당신을..봤었지.. 그래도 좋았단 말이야...그대의 무심한 마음에도 아랑곳없이 ..그대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소....알아요..알아...다..알아요...나도 그렇단 말이오..."
소녀의 얼굴은 이미 흘린 눈물과 지금 흐르는 눈물로 홍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눈물을 훔치면 또 흐르고, 훔치면 흐르고, 눈물샘이 터졌는지 좀처럼 멈추지 않았지요..
소녀는.. 이젠 아예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흐느끼고 있었지요..... 행여나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 왕자님의 단잠을 깨울까봐, 왕자님의 손에 감싸 인 자신의 손을 살며시 빼내어 입을 틀어막기까지 했답니다....소녀는 그렇듯이.. 맘놓고 소리내어 울 수조차 없었지요......
"왕자님, 왜 이렇게 자꾸 눈물이 나오는지 모르겠어요..왕자님만 생각하면 항상 눈물이 먼저 나와요...아마도 왕자님은..이런, 저를 보고 울보라고 할지도 ..모르겠네요..전.. 울보예요..어쩔 수 없는 울보..왕자님만 생각하면 눈물부터 나오는 울보랍니다..."
울먹울먹....입을 꼭 틀어막은 채 흐느끼는 소녀의 모습은 참으로 가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