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녀를 보았습니다. 소녀의 모습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호하기만 했지요.
연륜이 깊게 내려앉은 노파의 주름진 얼굴엔 뜻 모를 표정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노파의 눈동자가 몹시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아가씨는 ..왕자가 처음 이곳을 지났을 때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왕자는 안개여인을..그리고 아가씨는 왕자를... 서로 다른 방향을 보며, 사랑을 찾아 떠돌고 있는 게야. 쯧쯧...사랑이야.. 서로의 등을 보는 사랑.....쯧쯧..아가씨, 등을 보는 사랑은 말이우...결국엔 이루어지지 않는단 말이야...이룰 수 없어서 애틋하고 더 간절하기는 한데... 그런만큼 상대의 등을 보는
사람의 심장은 더 깊이 타들어 간단 말이유. 아물기 힘든 마음에 상처를 안고..살아간단 말이지...평행선을 긋는 사랑, 등을 맞대고 있는 사랑, 서로의 마음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사랑이야..이쯤에서 아가씨의 마음을 접어요..더 깊이 상처 입기 전에..말이유. 아가씨가 찾는 왕자의 마음은 이미 안개여인에게로 향해있으니..아무리 아가씨가 노력한다 해도 돌릴 수가 없단 말이우. 아가씨와 같은 눈빛으로, 같은 마음으로 이곳을 지나던 왕자였지..아가씨를 돌아 볼 마음의 자리를, 그는 이미 안개여인에게 모두 빼앗겨 버렸다우..아가씨의 마음을.. 그는 절대 알지 못한단 말이우..전에도 그랬을 거구..지금도 그럴 것이구...또 앞으로도 그럴거유..
그가 그리워하는 여인을 찾을 때까지 그는 발길을 돌리지 않을 거유..그의 눈빛이 그걸 말해주었었지. 가엽게도 그는 진실을 보는 마음이 부족해..그가 지금껏 찾는 여인을 곁에 두고도 헤메고 있는 건..바로 그가 진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야....서로의 등을 보는 사랑을 하게 된 것도, 다 그때문임을...쯧쯧...그가 진실을 볼 때까지 아가씨와 왕자는 계속 이루지 못하는 사랑에 눈물지어야 할거유...그는 오만한 사람이라우..그의 높은 자존과 오만함으로 스스로 고통의 형벌을 받게 된 거란 말이유.. 어리석은..사람.... 아가씨, 이쯤에서 마음을 접어요..이제 그의 등은 그만 보란 말이우..그가 돌아 볼 것 같수? 그럴 것 같았으면, 아가씨도 그도..이곳까지 흘러들지는 않았을 거란 말이우..쯧쯧......"
노파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길게 늘어놓은 뒤, 마을의 저잣거리로 발길을 내딛었습니다.
소녀는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그런 노파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대요.
노파의 모습이 소녀의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곤 소녀는 노파의 말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왕자님이 계신 '절망의 나라'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왕자님을 보기 위해 제가 왔어요. 오직 왕자님을 만나기 위해서요..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까..당신의 모습을 보게 해주세요...나를 위한 미소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당신의 웃는 모습을 보게 해주세요.. 그것도 안 된다면, 먼발치에서라도 당신을 보게 해주세요...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어요.. 그저 당신의 곁에서 당신의 모습 지켜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먼발치에서라도 그대 모습 바라보고 싶어요..아주.. 아주..조금의 우연이라도 좋으니까..그대를 만났으면 좋겠어요. 설사 그것이 마지막이 될지라도... 당신의 모습을 보게 해 주세요..서로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다 헤어져도 좋아요...당신을 만나고 싶어요..단 한번의 만남으로 우리의 인연이 다한다 해도 좋아요..그러니.. 왕자님..당신의...모습을 보게해 주세요...'
소녀는 노파가 알려준 길을 따라 쉬임없이 나아갔습니다.
왕자님의 자취를 알게 되었으니 이제 속도에 박차를 가하는 일만 남았던 거지요..
뜸들이며 머무를 시간도 없었습니다...왕자님이 깊은 절망으로 발길을 돌리기 전에, 소녀는 왕자를 만나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결국 소녀는 '절망의나라'에 이르게 되었대요.
소녀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그토록 보고싶어하던 왕자님의 모습도 보게 되었습니다.
행색은 초라하고 앙상하게 메마른 것이...인간의 형상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어찌나 남루하던지...소녀는 처음엔 그가 왕자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고 했지요.
하지만, 얼핏 얼굴에 스쳐간 그의 미소를 보고서 소녀가 찾아 헤매던 빛의 왕자님이란 걸 알 수가 있었대요.
소녀가 처음 왕자를 발견하였을 때, 그는 멍한 시선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소녀는 생각했대요.
아마도 신비의 여인을 찾고 계시는 것이라고요....
소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왕자님은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대요..
간간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간간이...맑게 눈빛을 빛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