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우울한 모습에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나를 보는 너의 눈빛에 담긴 이야기들을 꿰
뚫어 봤어야만 했다. 그러나 난 그런 널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 몰래 아픈 한숨지으며 슬
퍼하는 너의 모습을 어리석은 난 네가 앓아누워서야 겨우 돌아보았다. 힘없이 드러누워 있
던 넌 방문 앞에 멈칫 서 있던 나를 보며 손짓을 했다. 나는 부드럽고 유연한 너의 손놀림
에 취한 듯 네게 다가서며 물었다.
“왜 이러고 있니?”
나의 질문에 넌 여린 숨을 내 쉬며 말했다.
“잠깐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 뿐이야. 내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인생에 실망을 했던가 봐.
그냥 가슴이 아파. 큰 바윗덩어리 하나가 가슴 한가운데 박힌 것 마냥 답답하거든. 아무리
숨을 크게 내 뱉어도 뚫리지가 않아.”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네가 그렇게 아파해야만 했던 거니? 식은땀을 흘리며 뜨거운 숨을
내 뱉는 너의 모습에 너 못지않게 내 가슴은 한없이 타들어 갔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렇게?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그리고 또 다섯 번. 왜 모두들 날 가만 놔두지 않는 걸까?”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하잖아. 네 말처럼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을 겪어봤으니 덤덤해질
만도 하잖아. 다섯 번이 되면 어떻고 여섯 번이 되면 어떠니. 넌, 결국 원하는 대로 네 인
생 이끌어 갈 거면서.”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나의 손을 잡아끌던 너. 아름다운 너의 가슴 위에 살포시 놓여져 있
는 나의 손에 심약한 네 심장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강해질 줄 알았어. 단련되어 질 줄 알았어. 네 말처럼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을 경험했
으니 똑같은 일이 내게 일어난대도 끄떡없을 줄 알았어. 다섯 번이 되고, 여섯 번이 된다한
들 결국엔 내 뜻대로 살수 있는 게 내 삶이라 믿었어. 들리니? 활기를 띠며 힘차게 뛰어야
할 내 심장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니?”
아, 얼마나 가슴이 아팠으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너의 갈색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나는
“괜찮아..괜찮아..”만 연발했다.
내가 곁에 있어도 너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너 그렇게 힘들어하고 있을 시간에도
난 내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날 용서해 주겠니? 용서의 뜻으로 말끔히 자리를 털
고 일어서서 너의 그 맑은 미소를 내게 다시 보여주겠니? 하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난
결국 하지 못하고 “괜찮아. 괜찮아”만 이야기 해 주었다.
“나 혼자만의 인생으로 끝이 나는 거라면 차라리 좋았을 걸. 왜 내 인생은 나 아닌 다른 이
의 인생과 연계되어 있어야 하는 거지? 왜 내가 사는 인생이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인생에
도 영향을 미쳐야 되는 거니?”
넌 여전히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너무나 슬프게 말했다.
“내가 선택하며 사는 삶을 살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누군가가 선택해서 살아
가는 인생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그리고 그런 내 삶
으로 인해 나와 연계된 이들의 인생이 깊이 영향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있
잖아. 지금의 나는 하나도 즐겁지 않아. 만족스럽지 못해. 그리고 내 인생이 가까운 이들에
게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너무나 괴롭고 절망스러워. 이렇듯 내 뜻대로 살수 없는
인생을 무슨 힘으로 버티어 나갈 수 있겠니? 이렇듯 평생을 내 뜻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럽게 나의 가슴을 헤집어 놓는 데 말이야.”
그런 거였다. 네가 가슴앓이를 하는 이유는.
너의 인생이 너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인생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 너는 의도하지 않았
는데도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인생과 연계되어 있어 네 뜻을 맘껏 펼칠 수만은 없다는 것.
그 사실로 인해 네가 꿈꾸는 삶을 살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것. 그것이 널 절망에 빠지게
한 거라는 것.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사회적 동물...사회적이라는 게
뭐니? 보편적이고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것??
그거 좋지. 쉽고, 간단하고, 단순하고 게다가 이해도 빠르고 정말 편하고 좋아. 하지만 보
편적이고,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것은 이미 현실에서는 획일화되어 있어. 아무 개성도 없
이 모두가 똑같단 말이야. 이상하게도 나는 획일화 된 삶이 최상인줄만 아는 사람들 속에
서 버티어 나간다는 게 몹시 힘겨워. 그들과 발맞추어 가기가 버겁고 어렵기까지 해.
그런 나를 보며 그들은, 내 발걸음이, 보폭이, 생각이, 자신의 행보에 지장을 준다며 내가
가는 길에 제동을 걸어 와. 대열에서 이탈하지도 말고 튀지도 말고 자신들과 똑같은 행보
를 걷도록 더 신경 쓰라며 채찍질하기도 해. 난 사회적 동물이기 이전에 하나의 인격을 지
닌 독립된 개체이기도 하잖아. 그러니까 개인의 삶도 존중해 줘야 하는 거 아니니?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 해도 내 개인의 삶은 어느 정도쯤은 존중해 줘야 하는 거잖아.”
너는 열에 들떠 있는 채로 계속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 하면서 동조를 얻어 내려는
듯 내 손을 자꾸만 잡아끄는 너의 손엔 어느새 식은땀으로 온통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리
고 나는 여전히 “괜찮아, 괜찮아.” 만 되뇌다가 급기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강하게 도리질
을 하면서까지 토로하던 너를 보고는 처음으로 길게 말다운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진정하고 내 이야기 좀 들어 봐. 언젠가 네가 내게 했던 말 기억해?
그때 넌, 세상에서 뜻대로 살수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했었어. 우리가 성공
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또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힘들고 어려운 고비
를 넘겨온 사람들이라고. 그들은 남들이 모두 만류하는 길을 소신껏 걸어 왔기에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고.
때론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때론 정신병자라는 소릴 들으면서, 때론 얼토당토않은 허황된
꿈을 꾼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으면서, 때론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들의 의지
가 간절히 원하는 길로 걸어왔던 사람들이라고. 그런 그들이기에 종국엔 자기가 뜻한 삶을
살 수 있었고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있었던 거라고 했었어.
그럼 한 번 더 그들의 삶을 생각 해 봐. 결코 그 행보가 처음부터 끝까지 순탄하지만은 않
았을 거라는 것은 금세 그려 볼 수 있을 거야.
그들에게도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며, 획일화된 삶을 강요하던 사람들이 있었어. 그들의 그
러한 모습이 자신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며 자신들의 삶에 도움이 될만한 길을 가라고 시
도 때도 없이 닦달했던 사람들이 있었어. 또한 지금의 너처럼 심한 가슴앓이도 했었어.
역경이 없는 성공은 있을 수 없잖아. 고난이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잖아. 그리고 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인생과 연계되어 있는 삶이라는 건, 어쩌면 너나 내가 극복해야 할 진정
한 인생 과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봐. 그 연계 선을 끊을 수 있을 만큼의 과단성이 있
느냐 없느냐는 정말 중요하게 작용을 하겠지. 연계 선을 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
가느냐. 그렇지 못하고 연계 선에 얽매여, 그 선에 이어진 사람들의 뜻과 타협하며 삶을 살
아가느냐 하는 선택만이 지금 너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어. 그 외의 것은 모두가 네가 넘어
서야 할 시련이고 역경일 뿐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아무리 네 인생이 너와 가까운 혈연이
나 지연의 사람들과 연계가 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 너의 삶은 네 스스로가 선택한 대
로 일구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무리 주위사람들이 너의 의지를 그들의 의지에 맞추도록 들쑤시더라도, 네가 가는 인생
은 어차피 너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해. 그 모든 상황에서의 선택권이 너
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내 이야기를 확연히 증명해 주고 있잖아. 그러니까 앞
으로 네 인생의 향방은 바로 너 자신의 선택여하에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
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언제나 선택에는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도 잊지 마. 어떤
선택을 하든 극복해야 할 문제는 한두 가지 정도는 꼭 대두되거든. 네가 어느 쪽으로라도
방향을 잡고 선택을 하더라도 넘어야할 힘든 장애물은 반드시 있다는 뜻이야.”
모르겠다. 난 네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내 머릿속엔 온통 널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너를 향해 주절대는 말
들이 어떻게 내 입 밖으로 새어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네 가
슴앓이에 종지부를 찍고 싶은 마음뿐.
"다섯 번이 되던, 여섯 번이 되던 네가 힘들어 할 이유는 없어. 넌 이미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을 경험했으니까. 그 경험 속에서 너의 길이 어떤 것인지 절실히 깨달았을 터이니 문
제 삼을 일이 못되는 거야. 일곱 번이 되면 어떻고, 여덟 번이 되면 어떠니? 어차피 넌 몇
번을 되풀이되는 삶을 살더라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거잖아. 넌 네가 가야 할 길을 스스
로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사람들이 제시하는 대로 살아온 삶의 횟수는 너나 나에
겐 그만큼 아무 의미가 없는 거야."
넌 처음으로 내게 미소를 지어 보냈다. 그제야 넌 살며시 내 손을 풀어주며 너의 갈색 단발
머리를 쓸어 내렸다.
“그래..네 말이 맞아..다섯 번, 여섯 번이 되는 건 상관없는 거야. 내가 아팠던 것은, 매번
다른 삶을 걸어야하는 아쉬움과 서글픔 때문이었지. 곧장 앞으로 나아갔으면 벌써 목적지
에 도달했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많이 돌아와서 늦어버린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 때문이었
지. 그렇게 평생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위 사람들과 연계되어 있는 삶으로 인해 한없이
돌아가는 삶을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지.”
가녀린 너의 숨결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품어져 나왔다.
"이제 가슴 안의 바위가 사라졌어. 이제 다시는 다섯 번째가 오지 않도록 할 거야. 난 이미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을 겪어오면서 충분히 내 의지가 어떠한지 확인했으니까.
앞으로 살면서 오늘처럼 가슴앓이를 하며 아파해야 할 일들이 많을 거야. 오늘의 내 선택
으로 인해 감수해야 할 고난이 끊임없이 속출하여 괴롭히기도 하겠지.
그럴 때가 오면 오늘처럼 네가 내 곁에 있어 주겠니? 내 곁에서 너의 손을 내밀어 주겠니?
네가 그래 준다면 나 극복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설령 만에 하나라도 다섯 번째, 여섯 번
째가 다시 찾아온다 해도,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렇게 언제라도 내 곁에 있어 주겠니? 네가 있으면 난 내 궤도를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너, 그래 줄 수 있니?"
“바보야. 난 언제나 너와 함께 할 거란 말이야. 그걸 꼭 그렇게 말로 해야 아니?”
너는 나를 보며 말했다.
“고마워.”
나는 너를 보며 말했다.
“나도 고마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