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덤불 속의 여자가 문득 몸을 일으켰다. 그리
고 마치 최면에 걸린 듯 그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다행히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 때문에 여자의 발자국 소리가 전해지지 않아 여전히 여
자의 존재를 제 3의 존재는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덧 여자는 그들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거리까지 좁혀왔다. 그러자
한층 가까워진 거리에서 보는 그들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여자의 시야에 들
어왔다.
여자는 먼저 검은 것에게 시선을 두었다. 검은 것을 보던 여자가 갑자기 오른
손을 들어 가슴께를 가볍게 토닥이며 구토증이 치밀어 올라 울렁이는 속을 진
정시켰다.
-하얀 것이 그토록 몸서리치며 무서워했던 것이 당연할 만큼 저것은 몹시 추하
고 역겹기까지 하구나. 멀리서 지켜보았던 것 보다도 더 험악한 저것의 얼굴도
그렇지만 불길하게 번득이는 붉은 눈도 끔찍하다.
여자는 하얀 것이 그랬던 것처럼 검은 것을 외면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
만 모두 다 지켜보고자 하는 결의와 끝끝내 떨쳐지지 않는 그들에 대한 호기심
을 버리지 못해, 여자는 검은 것과 그의 가슴안에 싸여있는 하얀 것을 집요하
게 바라보았다.
그 순간, 아주 놀랍고도 기이한 일이 발생하였다. 하얀 것을 온 몸으로 품고 있
던 검은 것의 몸이 종전보다 더 탁하면서도 짙은 검은 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
이 아닌가! 그 모습은 마치, 엄지 손가락 마디 굵기의 검은 빛의 띠가 온 몸을
순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꿀럭꿀럭! 울룩불룩!
검은 빛의 띠가 검은 것의 몸 속을 이루고 있는 혈관을 지나칠때마다 미세한 혈
관까지 모두 화답을 하듯 꿀럭대고 울룩댔다. 특히, 검은 것의 팔 근육과 핏줄
이 아주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것을 보는 여자는 징그러운 듯 자기도 모르
게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살아있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처럼 검은 것의 혈관 하
나하나, 근육 하나하나가 꿀럭대고 울럭대며 춤추는 모습이 그 밤 내내 굻어졌
다 가늘어졌다 하며 내리는 암흑의 비와 같아 보였다.
여자는 그 모습에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털퍼덕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여자
의 비명소리에 한번쯤은 돌아볼수도 있었으련만 하얀 것의 몸이 바스라지도록
꽈악 껴안고서 활화산 같은 눈조차 깜박이지 않는 검은 것은 무언지 모를 것에
강한 집중력을 행사하느라 고개한번 돌리지 않았다.
그 틈에 여자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 혼신의 힘을 불어넣으며 다시 일어섰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검은 것의 가슴 안쪽에서 뭔가가 꿈틀꿈틀 하는 움직
임이 보였다.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검은 것의 팔이 들썩였다. 또한 하얀 날개
깃이 검은 것의 가슴께에서 몇 가닥 휘날리는 것도 보였다.
-어찌 된 일일까?
불현듯 여자는 하얀 것과 검은 것의 신체변화에 대한 상관관계가 궁금해졌다.
여자는, 검은 것의 몸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이 하얀 것이 죽음과 동
시에 이루어졌으니 분명 어떤 긴밀한 상관관계가 형성돼어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답답해.>
여자는 귀에 익은 하얀 것의 소리에 깜짝 놀랐다.
-대체 이 무슨.. 어떻게 이런 일이..
분명 여자가 들은 건 생명을 잃은 하얀 것의 소리였다.
여자는 좀 더 가까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들이 여자의 존재를 알아
챌 위험에 처해 있음에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여자의 발은 앞으로 앞으로 나
아가는데 여념이 없었다.
현재의 여자에게 있어 그녀의 존재가 제3의 존재에게 드러나는 것은 아무 문제
도 아니었다. 여자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금까지 놀라운 일이 발생
한 데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규명하는 일이었다. 눈으로 보고 있어도 믿어지지
가 않는 <제 3의 존재>를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게 된 모든 정황부
터 현재의 놀라운 광경까지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원인과 결과
를 알고자 하는 것 말이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는 오직 그 한 생각뿐이었고, 그
생각은 곧 공포조차 잊게 만들었다.
<네가 날 되살린다고 해서 그동안의 네 추악한 짓들이 용서가 될 줄 안다면 착
<br/>각하지 마. 네 더러운 짓거리들은 절대로 내 안에서 그리고 내 기억에서 없어지
지 않아! 알아? 못된 자식! 나쁜 자식! 더러워! 추해!>
여자는 진행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검은 것의 품에 안겨 독설을 내뿜고 있는 하
얀 것의 모습을 주시하였다. 그런 여자의 표정이 마치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것 처럼 경직이 되어 있었다.
-회생했구나!
여자가 보는 바와 같이 하얀 것의 모습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감쪽같이 재생이 되
어 있었다.
엉클어진 머리카락도 차분해졌고, 얼룩덜룩 핏자국이 선연했던 날개도 하얘졌
다. 그리고 절반이 넘게 빠져나간 새의 깃털도 거의 모두 재생이 되어 있었다.
또한 보랏빛 눈물로 엉망이 되었던 얼굴도 뽀얀 도자기처럼 매끈해져 있었으
며, 멍 자국이 가득했던 양어깨와 팔목, 온 몸의 피부 색깔도 깨끗하고 맑게 치
유 되어 있었다. 게다가 하얀 악마 같았던 표독스런 모습도 검은 것의 품에 안
겨 있는 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반짝반짝 빛이나는 순백의 모습이 어찌나 앙증맞고 사랑스럽던지! 검은 것만
아니라면 여자 자신이 대신 꼭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였다.
<추악한 널 보면 괴로워! 알아? 짜증이 난다구!! 제발 내 앞에서 꺼져 버려, 네
<br/>흉측한 그 몰골 좀 안 보게!! 평생을 이렇게 날 쫒아다니면서 괴롭힐 거면 이대
로 날 나둬.>
못된 성질은 여전한 듯 하얀 것은 힘을 얻자 마자 또 다시 거친 말을 가차없이
퍼부어 댔다. 여자는 검은 것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으나 모질게 뱉아지는 하
얀 것의 말에 극심한 가슴의 고통을 느꼈을 거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
다. 하얀 것을 회생시키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간단히 무시하는 하얀 것의 언사
에 상처입었을 검은 것의 마음이 그대로 여자의 가슴으로 전해졌기 때문이었을
까, 여자는 검은 것에 대한 동정이 일었다.
-바보 같긴.
여자는 검은 것을 측은히 바라보았다. 왠일인지 여자의 눈엔 검은 것이 더 이
상 흉측한 괴물로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만큼 가까이 <제 3의 존재>에게 다가갔
다. 제 3의 존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여자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거리
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자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등을 보이고 있는 검
은 것은 여전히 무엇인가에 집중하느라 몰랐고, 가슴 안의 하얀 것은 아직은 회
복단계에 접어드는 중이라 몰랐다. 여자에게 있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
닐 수가 없었다. 어찌되었든 여자는 이로써 지금까지와는 또 다르게 검은 것과
하얀 것 사이에서의 괴현상을 더욱 확연히 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