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목구멍 속으로 넘어가는 맥주가 참으로 시원해 보였다. 표정하나 없이 꿀럭
꿀럭 맥주를 잘도 삼키는 너, 참 맛있게도 마신다. 그런데 아무 말도 없이, 아
무 표정 없이 연신 목구멍 안으로 맥주를 마시는 너의 모습이 아프게만 느껴졌
다. 넌 그런 내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오후 4시가 넘어 사들
고 온 순대를 소금에 찍어 야금야금 씹어 먹기까지 했다. 난 이상하게도 그런
너의 모습을 보는 게 싫었다.
저녁이 다 되가는 그 시간에 텅 빈 네 뱃속을 채우고 있는 맥주와 순대가 무척
초라해 보였다.
난 안절부절 아무 말도 못하고 그런 널 지켜보고 있었다.
꿀럭꿀럭, 짭짭짭
맥주를 삼키고 순대를 씹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내 귓가에 흘러들었다.
그날의 난 너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순대가 아닌 훌륭한 스테이크
를, 맥주가 아닌 고급 포도주를 사 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 흔한 하얀 쌀밥에 구수한 된장찌개마저도
사줄 수가 없는 빈 주머니가 그날따라 유난히 더 가볍게 느껴졌다. 넌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난 지금 대단한 만찬을 하고 있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사람과의 멋진 시간을
들이키고 있는 게 안 보이니? 잘 봐. 나를 포장하고 있는 껍데기들을 떨쳐내고
화려한 만찬을 즐기고 있는 나를."
나는 불현듯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나는 어느새 가득 채워져 있던 네 앞
의 맥주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넌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순대 하나를 집어 우물거렸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 표정도 없이.
“왜 이렇게 사는데! 왜 이렇게 살아서 이 청승을 떨고 있는데!"
내 이성이 마비되어 있을 때면 나는 언제나 야멸차게 네게 횡포를 부리게 된
다. 다음날이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네가 알고 있다 해도 모른 척 해줄 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성급히 들이켠 한 잔의 맥주로 너무나 빨리 그리고 쉽게 취해버린 상태였다.
“좀 쉽게 살면 안 돼? 남들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편하게, 편하게
살면 안 돼?"
순간, 넌 발개진 얼굴을 내게로 돌렸다. 슬픔과 원망이 섞인 네 눈이 타오르는
분노로 일렁이고 있었다.
“넌 뭐든지 편하게 생각하고 쉽게 말하는 구나. 다분히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사유를 하는 너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런 너의 생각을 내게 강요
해서는 안 되지. 착각하지 마. 난 너와 닮은꼴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우린 엄연
히 달라. 똑같은 생각을 영유할 수는 없다구. 서로가 지닌 삶의 모습마저 똑 같
아진다면 내가 어디 있고 또 너는 어디 있겠니. 결국 우리에게 남는 건 파멸 밖
에 없어. 나도 없고 너도 없이 정형화된 우리만 존재한다는 건 결국 너의 삶을
사는 것도 나의 삶을 사는 것도 아닌 거니까 말이야. 세상이 만들어 낸 평균치
의 삶을 쉽고 편하게 사는 것이 대체 그런 너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
니?"
원망스러웠다. 언제나 날 돌아보지 않고 책망하는 네가 원망스러웠다. 어차피
너와 난 그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난 다음날이면 네가 까맣
게 잊고 기억하지 못할 말을 마음껏 퍼부었다.
“하지만 맥주와 순대로 이루어진 너의 식사가 평균치의 삶을 사는 사람의 그것
보다도 초라해 보이는 건 사실이야. 대단한 만찬이 될 수가 없는 게 당연한 거
라구! 고급의 스테이크와 부드럽게 목을 적시는 포도주까지는 아니더라도 보통
의 사람들이 누리는 그것만이라도 네가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 드는 걸 막을 수
가 없어! 니가 아니면 어때! 내가 아니면 어때! 조금은 편하게 쉽게 모두가 가
는 방향으로 눈 돌리자는 것뿐인데. 보편의 우리로 사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아!”
너를 향해 내 속의 말을 쏟아내는 사이, 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결국 네 앞
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눈물을 흘려도 넌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아무것
도 모른다는 듯 무표정한 모습으로 묵묵히 술잔에 맥주를 가득 부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순대를 찍어 오물오물 냠냠 씹어 먹었다. 나는 서러운 눈물을
삼키며 네가 들어도 기억하지 못할 말을 연이어서 쏟아 내었다.
“나로 살고, 너로 사는 것이 초라한 맥주와 순대로 배를 채우는 것으로 연명
되는 것이라면 하얀 쌀밥의 평범한 우리의 삶을 따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
적어도 이상을 위해 주머니가 텅텅 비어있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맥주와 순
대라니!! 대체 이게 무슨 궁상이고 청승이란 말이니!”
내 말은 너의 머리 속까진 울리지 못한 듯 했다. 이미 상당수 마신 맥주의 영향
으로 너의 이성이 마비되고, 이지적으로 반짝이던 너의 눈빛이 흐려진지 오래
였으니 네 머릿속을 울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넌 마
지막 내 이야기에 흐렸던 눈빛을 명민하게 빛냈다. 어느 사이인지도 모르게 단
호함까지 자리 잡은 발그스레한 네 얼굴엔 엄숙한 기운마저 풍겨 나왔다.
“기름진 고기와 포도주로 내 배를 채우자고 날 버리면서까지 남들 생각대로
사는 거, 그건 배를 곪고 사는 것보다도 더 싫어. 맥주와 순대가 어때서? 어떤
이유 때문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스스로의 뜻을 져버리고 쌀과 고기를 사, 살을
찌우는 것에 목적을 두고 행복이라 생각하는 단순한 우리의 무리에 끼어 살고
싶지는 않아. 그들의 삶은 그들의 삶 일뿐 너의 삶, 나의 삶이 될 순 없어. 스스
로의 만족이 아닌 우리가 보고, 느끼고, 판단하고, 결정해서 인정해야만 만족하
는 삶은, 방대한 너와 나의 이상을 가꾸며 사는 것에 비해 너무 빈약하다고 생
각하지 않니? 너와 난 목표가 되는 삶의 궤도부터가 달라. 그런데 어떻게 평균
치의 그들과 같은 마음을 하고 만족하며 살수 있겠니? 맥주와 순대만으로도 만
찬을 누리는 나는, 지금 이 순간 만족하고 행복해. 내가 초라하고 궁상맞고 청
승맞아 보이는 건 오직 네 눈을 통해서일 뿐이고,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일
뿐이야. 내 눈을 통해서 보는 맥주와 순대는 고기와 포도주에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식사 메뉴. 그걸 스스로 깨달아 알고 있는 난 그 누구보다 행복해. 그러
니까 내가 아닌 너의 눈,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판별이 되는 그런 잣대는 내겐
하등 소용없어. 나의 만족과 행복은 무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뜻을 버리지
않은 내안에 있는 거니까 말이야.”
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비워진 잔에 다시 맥주를 따르는 무표정한 널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잠 순간 슬픈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1
분, 2분, 3분.
“미안해.”
드디어 네가 혀가 꼬인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그런데 나, 지금도 몹시 허기가 져서 계속 먹어야겠는데.. 같이... 먹
지.. 않을래?”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너는 다시 말했다.
“미안해. 하지만 만약 여전히 내 밥상이 초라하고 궁상스러워서 내키지 않는다
면, 붙잡진 않을 테니까 우리가 만들어낸 평균치의 식탁을 찾아 가든, 우리보
다 더 나은 고급의 스테이크와 포도주가 있는 기름진 식탁을 찾아 가든, 나의
밥상에서 고요히 사라져 줘.”
넌 말을 마치자마자 또 다시 비워진 잔에 맥주를 따라 입으로 가져갔다.
꿀럭꿀럭.
네 목구멍 속으로 넘어가는 맥주가 참으로 시원해 보였다. 표정하나 없이 꿀럭
꿀럭 맥주를 잘도 삼키는 너. 발그레한 두 뺨을 부풀리며 한번에 맥주를 들이키
는 너. 참 맛있게도 마신다. 정말 맛있게도 마신다.
나는 말했다.
“너는 유약한 듯 하면서도 너무나 강하다. 늘 흔들대며 휘청 이는 것 같으면서
도 꿋꿋하다. 너무 견고하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아무 표정도 없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다는 듯이, 순
대를 소금에 찍어 야금야금 먹는 너를 보았다.
나는 검은 당면으로 오글오글 속이 꽉 찬 순대를 들었다. 그리곤 한입에 푹 집
어넣은 채 오물거렸다. 순대는 참 맛있었다. 오물오물 씹을 때마다 입 안에 가
득 퍼지는 순대의 고소함이 하얀 쌀밥과 된장찌개를 잊게 했다. 스테이크와 포
도주를 잊게 했다.
나는 검은 당면이 톡 터지며 입에서 배로 넘어갈 때마다 다시 순대를 입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 네가 보였다. 발그레한 웃음꽃이 사
그라지지 않는 모습으로 꿀럭꿀럭 맥주를 들이켜는 너를 보며 내가 웃었다.
나는 그날 너와 함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저녁 만찬을 나누었다. 그 누구도
누릴 수 없는 고소하고 쌉싸름한 너와 나만의 풍성한 저녁만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