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사물이나 현상, 사람등 하나 하나 의미를 부여하는 거 말이야. 넌 그거 어떻
게 생각하니? 나는 너무나 쉽게 그리고 자주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러면서 <의미<BR>부여하기>에 따라 수반되는 내 모든 감정들에 대해서 자꾸 의구심을 품게 된다. 난
과연 잘하는 것일까? 나중에 이러한 나의 <의미부여하기> 때문에 깊이 후회하게 되
지는 않을까?"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던 네가 내게 묻던 말이었다. 네 옆에 같은 자세로 앉아 있던
난 그때까지도 길게 뻗어 있는 너의 속눈썹을 바라보느라 네 질문에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넌 유난히 속눈썹이 길다. 그리고 검은 속눈썹이 길게 뻗어 있는 너의 눈에
는 늘 깊은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언제나 진중하고 차분한 사색으로 깊이
젖어 있고, 세상을 겪으며 얻게 된 상처와 번민으로 채워져 있다. 나는 늘 그런 너의
눈을 가슴 졸이며 묵묵히 바라보기만 한다.
그 날의 넌 체념한 듯한 모습으로 세운 무릎에 고개를 고인 체 그 큰 눈을 아래로 내
려 뜨고 있었다. 행여나 슬퍼하는 네 모습이 내게 보일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억지
로 말아 올리는 너의 가슴 시린 미소위로 유난히 짙은 너의 속눈썹이 어둠의 장막처
럼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날 나는 너의 눈을 단 한번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너의 긴 속눈썹에 감싸여진 눈
동자를 그리며 하염없이 너의 옆모습만을 바라 볼뿐이었다.
“내 말 못 들었니?"
네 질문에 대해 대답 없던 내게 넌 아주 차갑게 말을 건넸다. 그러면서도 넌 날 돌아
보지 않았다. 네 눈이 보고 싶었는데. 네 마음이 드러나 있을 그 눈이 보고 싶었는데.
넌 나와 눈조차 마주치기 싫은지 돌아보지 않았다.
난 너무나 절절히 네 눈이 보고 싶었다. 널 힘들게 하는 마음을 네 눈을 통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고요히 힘들어하는 너를 감싸 안고 싶었다. 하지만 넌 날 보지 않았다.
“내 말 못 들었구나?"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넌 더욱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때까지도
너의 고개를 세워진 무릎 위에 꼼짝 않고 올려놓은 채로.
“아니, 들었어.”
“그럼 말해 줘."
나는 너의 눈을 바로 보며 얘기하고 싶었다. 네 속눈썹을 바라보며 하는 얘기가 아
닌 네 눈을 보며 하는 얘기가 되길 바랬다. 그러나 무심한 넌 그런 내 마음을 외면한
채 끝끝내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길기만 한 네 속눈썹에 드리워진 그림
자를 바라보며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의미를 부여한다는 거. 난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의미를 부여하면
조금 특별하게 기억 속에 남을 수 있어서 좋겠다고, 그렇지 않으면 쉽게 잊을 수 있
어 부담되지 않아서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난 나름대로 다 괜찮다고 생
각해. 그런데 넌 아닌 것 같아. 너는 그것 때문에 아주 나중에라도 깊이 후회하게 될
까봐 걱정하는 것 같고, 그것 때문에 느껴야 할 네 감정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 그래
서 너의 <의미부여하기>에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거고 그게 슬퍼서 지금의 질문을 내
게 던져 준 것 같아. 맞니?"
너는 아무 말도 없이 마지막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세워진 네 무릎 속
으로 고개를 깊이 떨구었다. 너의 고개는 점점 더 깊이 아래로, 아래로..
무겁게 아래로만 치달으려는 너의 고개 짓에 나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손 내
밀어 너의 고개를 나를 향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음에도 모른 척 하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를 봐야지!
난 네가 듣지 못할 말을 외쳐보았다. 혹시라도 네가 듣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그
러나 소리가 되지 않는 나의 외침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는 외침은 제 아무리 절절하다 한들 아무 의미가 될 수 없는
걸. 그러니 되돌아온 외침은 이렇게 시린 아픔으로 스스로를 상처 낼 뿐이지. 그러
고 보면 어떠한 사물, 현상, 사람등 하나 하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곧 아픔이고 상
처이고 슬픔인 것 같다.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그래서 그 의미 부여의 강도가 커지
게 되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오래 남게 될 것이지만, 그 기억이 좋은 기억이라
면 모를까 생각하기조차 괴로울 만큼 고통스런 기억이라면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
겨진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아픔이고 상처이고 슬픔일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
겠다. 나는 순간, 네가 진정 겁내고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사실 일 것이란 생
각이 들었다. <의미부여하기>를 통해 얻게 될 고통스런 기억으로, 나중에라도 후회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
은 그리 좋을 수만은 없다는 걸 너는 질문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
다.
의미를 부여하면 할수록 그 대상이나 현상에 대해 거는 기대치는 그만큼 커지게 되
는 법. 그리고 그렇게 큰 기대를 갖게 된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아픈 상처를
입게 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법. 그렇다면 넌 그 사실을 이미 알고 내게 의미부여
하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거였을까. 그렇다면 너! 그렇게 네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에 무분별한 <의미부여하기>를 해서는 안 되는 거다. 만약 네 <의미부여하기>
의 대상이 되었던 모든 것들로부터 네가 기대했던 것과 꼭 같은 응답이 되돌아오지
않을 때가 오면 넌 아주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고 말 거니까. 그리고 아주 오랫동
안 그 기억으로 아파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니까.
그런데 난 너에게 그 말을 차마 전하지 못했다. <의미부여하기>가 너에게 어떤 의미
를 갖는지 충분히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솔직한 내 마음을 얘기 할 수 없었다.
넌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의미 있는 존재로 오래도록 기억되길 바랬다. 그런 이유
로 넌, 네가 세상의 모든 것에 의미를 지니고 특별하게 기억해야 네 존재도 그것들
에게 특별하고 의미 있게 기억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난 다 알고
있었다. 네가 처음 내게 질문을 던졌을 때부터 이미 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너는 매정하게도 솔직한 네 생각을 내게 잘 말하지만, 네 앞에선 한없이 유약하기
만한 나는 그러지 못한다. 그래서 매번 너에게 내 진심을 말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
한다. 그럼에도 너는 내 진실의 마음을 금세 알아챈다. 특유의 날카롭고도 예민한
네 감성이 나의 표정과 말, 행동에서의 미세한 변화를 정확하게 감지하기 때문에 네
앞에서는 굳이 내 마음을 드러내지 않아도 모두 들통이 나고 만다. 그날도 넌, 네게
전하지 못한 내 진실의 마음을 알아차리곤 말했다.
“네 생각은 그랬구나. 그럼에도 나의 <의미부여하기>는 앞으로도 계속 될 거다. 하
지만 네 생각은 충분히 알았으니까 앞으로는 무분별하게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
지는 않을 거야. 확신이 있다고 판단되는 것들에게만 의미를 부여할 거야.”
넌 이미 내게서 확인해야 할 말을 다 들었다는 듯이 극도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역시나 내겐 일말의 시선조차 두지 않고서 말이다.
“그런데 난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내 판단이 항상 옳기만 할 수 있을까?"
난 정말 네 눈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네 눈을 보지 못했다. 다만 무릎 가까이
맞닿은 채로 찰랑 흘러내린 너의 단발을 고요히 쓰다듬을 뿐이었다.
“아무 걱정하지 마. 내가 옆에 있잖아. 확신을 갖지 못해 네가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문제가 발생하면 내가 도와줄게.”
“응."
“날 믿어. 네가 힘들 일, 아파할 일, 후회할 일, 두려워 할 일 없도록 늘 네 곁에서 지
켜 줄게."
“응.”
나는 순간 너의 긴 속눈썹 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길게 내리 뻗어
있는 너의 속눈썹 끝에서 맑은 이슬이 반짝이는 것도 보았다. 네 속눈썹은 점점 더
무릎 아래로 향해 가고 있었다. 길고 긴 너의 속눈썹... 그런 네 속눈썹에 맺힌 슬픔
의 무게 때문인지 속눈썹과 함께 너의 고개도 자꾸만 자꾸만 세워진 네 무릎 속 아
래로 파고들었다. 넌 그렇게 끝까지 내게 네 얼굴을 볼 기회를 주지 않았다. 네 눈이
보고 싶었는데. 정말 보고 싶었는데.
나는 무릎 속에 꼭꼭 숨어버린 너의 얼굴을 그리며 작게 되뇌었다.
“너의 속눈썹엔 슬픔이 맺혀 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슬픔의 무게를 평생 내가 덜어 주겠다고, 그래서 속눈썹의 무
게로 고개 떨구는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왜냐하면 너는 내 삶의 가장 큰 의미로 다
가선 사람이기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