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이성을 잃고 발길질을 해대는 하얀 것을 그대로 놔두면 끝이 없을 것
같아 버럭 소리치며 하얀 것의 다리채를 잡고 넘어 뜨렸다. 체구가 작아 유달
리 연약한 하얀 것은 너무나 쉽게 여자의 힘에 굴복 됐다.
“아쿤에게 그러지 마. 내가 아쿤을 감싸는 건 아쿤이 너보다 더 좋아서라기 보
다는 아쿤의 마음에 대한 네 행실이 옳지 못하기 때문이야.”
여자는 널브러진 하얀 것을 일으켜 세워 안으며 말했다. 하얀 것은 여자의 갑작
스런 행동에 놀란듯 순한 눈망울을 크게 떴다. 여자는 달콤한 향기를 뿜어내는
하얀 것의 은빛 머리채를 쓰다듬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넌 아주 예뻐.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만큼. 그런데 네 못된 성질이 널 싫어하
게 해. ”
<나 못된 거 아니야.>
“못됐어.”
<아니야.>
“널 진짜 사랑하는 아쿤을 괴롭히고 상처입게 한 게 못 된게 아니면?”
<..그래, 나는 나빠.>
여자는 자신의 가슴안에 안겨 있는 하얀 것이 천진한 아기같다고 생각했다. 잔
혹한 말과 행동을 했던 하얀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만큼 하얀 것은 여자의
품 안에서 다소곳했다. 하얀 것은 부끄러운 듯 하얀 볼을 발그레 붉히며 여자
의 품을 파고들었다. 여자가 방긋 미소지었다. 여자는 의외로 순진한 하얀 것
이 귀여워서 하얀 것을 꼬옥 안아 주었다. 하하. 하하. 방울소리 같은 하얀 것
의 웃음소리가 여자의 가슴 속을 꽉 채웠다.
“넌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구나.”
<하하. 하하. >
아쿤이 여자의 등뒤로 붉은 눈을 무섭게 번득였다. 그러나 여자와 하얀 것은 아
쿤의 눈빛을 알지 못했다.
“아쿤에게도 자주 이렇게 사랑스럽게 웃어줘. 아쿤은 널 아주 깊이 사랑해.”
여자가 말했다. 하얀 것은 방울 웃음을 멈추고 잠시 아쿤을 넘겨다 보았다. 그
러다 여자의 품을 벗어나 아쿤이 있는 곳으로 가 그를 일으켜 세워 앉혔다. 아
쿤은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하얀 것은 아쿤의 날개를 조심스레 쓰다듬었
다.
<많이 아파?>
아쿤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얀 것은 고개 숙인 아쿤의 목을 끌어 안았다.
<아쿤, 내 악의 기운을 모조리 되돌려 줘.>
하얀 것이 말했다. 아쿤이 눈꼬리를 아래로 내려뜨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 나서 할 수 있다면, 너 혼자 고향으로 돌아가. 만약 고향으로 돌아가
<br/>는 것이 어렵거든 이 별의 생물체와 함께 해 줘. 어찌되든 난 블랙홀을 찾아 갈
거야. 그게 너와 나의 운명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걸.>
아쿤은 미친듯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멈췄던 눈물을 다시 흘렸다. 그런 아쿤을
보는 여자의 마음이 아련히 젖어들었다. 아쿤이 여자를 쳐다봤다. 하얀 것을 보
던 갈망이 아닌 살의와 증오가 담긴 눈빛이었다. 여자는 아쿤의 눈빛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하얀 것은 슬픈 눈을 하고선 아쿤의 얼굴을 들어 찬찬히 뜯어 보았다. 눈살을
찌푸리거나 혐오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아쿤은 자꾸 고개를 아래
로 숙이려 하였다. 하지만 하얀 것은 내려가려는 아쿤의 얼굴을 들어 눈을 맞추
었다. 하얀 것은 자신의 하얀 손을 들어 억센 머리털을 지나, 붉은 눈, 하얀 눈
썹, 하얗게 녹아내린 볼을 쓰다듬어 내려왔다.
<나는 너다. 너는 나다. 하지만 이젠 나는 나로 살고 싶어. 나는 너가 아닌, 너
<br/>는 내가 아닌 삶 말고 나는 나, 너는 너의 삶을 살아야 해. 잊고 있었는데 이 별
의 생물체의 이야길 듣고 생각이 났어.>
아쿤의 눈물은 그칠줄 몰랐다. 아쿤의 얼굴이 눈물에 하얗게 녹아 내리는 것
이 꼭 아쿤의 조각난 심장이 녹아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를 지켜보던 여자의
눈에서도 어느새 눈물이 흘렀다.
하얀 것은 여자를 향해 돌아섰다.
<아쿤을 돌봐줘. 내가 하지 못한 것까지.>
여자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하얀 것에게서 느껴지는 비장감이 여자를
한없이 불안하게 했고, 방망이질 하듯 심장을 뛰게 했다. 아쿤은 얼굴이 타는
것도 상관 않은채 눈물을 흩뿌리며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온 몸을 흔들어댔
다.
외마디 비명조차 지를수 없는 슬픔이 아쿤의 눈물과 온 몸을 통해 묻어 나와 여
자의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그를 그만 괴롭혀! 원치 않잖아. 아쿤이 원하지 않는다고 온 몸으로 이야기 하
고 있잖아! 그냥 아쿤을 사랑하며 함께 지내란 말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평생을 함께 하며 지내. 이 못된 것! 고약한 것!”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아쿤과는 그렇게 지낼 수 없어. 아쿤의 모습을 보면서
<br/>아무렇지 않게 살 수 없는게 나야. 아쿤을 보면 괴로워. 한없이 괴롭고 아파. 보
고 싶지 않은 내가 아쿤의 모습속에 있어서 한시도 견딜 수가 없다구! 평생을
아쿤을 경멸하고 괴롭히며 살게 될 거고, 그걸 받는 아쿤은 평생을 짐승 같은
모습으로 상처입으며 살게 될 거야. 너는 우리 사이의 일을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 편한 소리를 할수 있는 거야.>
하얀 것은 호소력 짙은 눈빛을 하고 여자 곁으로 다가섰다.
<너라면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무슨 소리야?”
<내 부탁을 들어 줘.>
뒤쪽에서 아쿤이 더욱 강하게 몸부림 쳤다. 그 모습은 마치 여자에게 하얀 것
의 청을 들어 주어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동안
여자는 아쿤을 보았다. 아쿤도 여자를 보았다. 처연하고 절망적인 아쿤의 모습
에 여자는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다시 하얀 것을 향해 눈을 돌린 여자는 혼란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하지?
간절함이 가득 배여 있는 하얀 것의 모습엔 도무지 청을 거부할 수 없게 하는
강력한 힘이 도사리고 있었다. 마지 못해 여자는 말했다.
“무슨 부탁인데?”
<먼저 약속부터 해. 꼭 들어 주겠다고. 아쿤과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부탁이
<br/>야.>
여자는 대답했다.
“알았어. 약속할게. 하지만 그냥은 안 돼. 너희 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
줘야 해. 또 왜 아쿤과 넌 아쿤은 아쿤대로 너는 너대로 살수 없었는지에 대해
서도 이야기 해줘야 해. 내 두 질문에 답해 준다면 너의 부탁은 반드시 이행하
겠어.”
대답하는 여자를 보는 아쿤의 눈빛이 또다시 증오와 살의로 번득였다
<알았어. 약속 꼭 지켜.>
하얀 것은 여자와 함께 아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처음인지 혹은 처음이
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미소를 아쿤에게 지어 보이며 그의 검은 손을 꼬옥 잡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