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간의 갈등을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그려놓았던 크래쉬라는 영화였는데 미국 내에서 백인과 흑인, 아시아인과 아랍인들 사이의 끝날 것 같지 않은 갈등을 그렸다. 사소하게 시작된 상처들이 또 다른 형태의 갈등으로 전이되는 악순환의 연속이랄까.
하지만 실타래처럼 꼬인 끝날 것 같지 않은 세상사도 사랑이라는 작은 행동에서부터 풀어나간다는 내용이었다.
여기 소록도라는 작은 섬에도 충돌(크래쉬)은 끊이지 않았다.
한센병(나병, 문둥병) 환자들이 수용된 그곳에 “새 원장이 부임해온 날 밤, 섬에서는 두 사람의 탈출 사고”가 발생한다. 더군다나 바깥세상의 손가락질에 쫓겨 섬에 유배된 그들인데다 전임 원장들의 만들어놓고 떠나버린 ‘동상(섬에 대한 전임원장들의 명예욕, 공명심)’으로 인해 정상인들에 대한 마음의 문이 사라진지 오래였기에 새로 부임한 병원장(조백헌)과 그가 제시한 섬 운영계획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내비치지 않는다.
더욱이 이곳 사정을 잘 아는 보건과장(이상욱)은 새 원장의 의욕 넘치는 활동이 섬 환자들의 상처만 더 긁어 놓지나 않을까 못미더운 눈초리로 원장을 주시한다. 그의 눈에는 새 원장 역시 전임 원장들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의 동상만을 채우고 떠나가 버릴 그저 그런 ‘정상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새 원장은 나병 환자들이 맘 편히 생활할 수 있는 섬, 진정한 천국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축구나 대표자회의를 만들기도 하고 섬에서 행해진 차별도 없앤다.
그리고 원생들과 함께 바다를 매우는 대규모 간척사업을 시작한다. 오랜 배신의 섬, 소록도 주민들은 쉽사리 사업에 동참하려들지 않지만 원장의 끈질긴 노력과 집념이 더해진 원생 스스로의 약속으로 사업에 동참한다.
둑길이 세워지고 허물어지길 몇 번, 손가락이 떨어져나가고 등허리가 굽어지는 길고 지루한 공사 끝에 드디어 330만평의 새 간척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그들을 뒤덮고 있던 눈물의 역사가 걷혀지고 새로운 희망이 쏟아지는 것처럼 광활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잘 마무리 될 것 같던 공사는 새로운 난관에 봉착하면서 중단되기에 이른다. 소록도의 나병 환자들에게 나누어질 ‘천국’은 점점 더 멀어지는 것만 같은데...
소록도의 원로격인 황희백 노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제 다시 이 섬에 치욕스런 배반의 일어나선 안 될 테니......”라 말한다. 결국 원생들의 배신감과 원장의 공명심만 부추긴 꼴이 되었던 아픈 과거사처럼 전락하고 말 것인가?
그러면서 천국에 대한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큰 목적이나 쟁점이 될 수 있는- 여러 질문을 던진다. 천국은 현실세계에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갈 수 있을까, 과연 나는 그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일상 속에서 ‘천국’이라는 자기만족, 혹은 집단의 목표를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 묻는다.
하지만 거기에 어르기까지의 과정이 타인의 의도나 강요에 의해서라면 어떤가. 과연 그렇게 도달한 천국에는 진정 행복할 수 있을까? 이렇게 찾은 만족은 우리들의 천국이 아닌 ‘당신들의 천국’으로 와전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책에 적힌 한 문구가 기억난다.
“천국이 무엇인가. 천국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마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스스로 구하고, 즐겁게 봉사하며, 그 천국을 위한 봉사를 후회하지 말아야 진짜 천국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말한다. 어쩌면 나환자와 정상인 사이의 인식의 차이 때문에 애초에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고 사랑이라는 수용적인 마음으로 차근차근 접근할 때 진정한 천국이 자라나지 않을까라고.
소록도를 통해 살펴보는 천국의 의미, 삶의 의미...
결국 우리 인생 최고의 키워드는 사랑이 아닐는지. 서로간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전제된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리라. 사회와 동떨어진 ‘당신들의 천국’이 아니라 사회속의 개개인이 주인이 되는 '우리들의 천국'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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