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추천으로 읽게 된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들은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것이 내가 바나나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내가 읽은 ‘티티새’라는 글은 바나나의 다른 글들과 비교하면 신비감이 많이 없는 그런 글이다. 그 대신에 바나나 특유의 간결한 문체로 일상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추억을 회상하게 한다.
글의 내용은 주인공인 마리아가 그녀의 관점에서 사촌인 츠구미에 대하여 몇 개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마리아가 이야기 하는 츠구미는 어렸을 적부터 몸이 약했기 때문에 응석받이로 자라 심술궂고 거친 성격을 가졌다. 그래서 남에게 상처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츠구미가 첫사랑을 하게 되지만 깊이 앓고 있었던 약했던 몸이 끝내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죽음의 종착역에 이르렀다는 그녀 스스로의 믿음을 통해 마지막 생을 정리하면서 그녀 자신 외의 사람들과 세상에 대해 마음을 열게 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츠구미는 죽지 않았다. 다만 죽을 뻔 했을뿐이었다.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언젠가는 죽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다. 다만 그 날을 기약할 수 없을 뿐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측은한 동정심은 인간을 다르게 변모하게 하는가 보다. 츠구미는 삶에 대한 동경이나 생존에 대한 욕구보다는 그러한 두려움과 동정심을 뛰어넘고자 하는 욕구가 더 강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언제일지 모르지만 마치 기약된 죽음인냥 매순간 내가 원하는 것을 치열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건 죽음을 기다리는 자의 사치스러운 여유일지도 모르지만 두려움과 동정심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일 것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남자 주인공 정원처럼 죽음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아버지를 위해 사진관 현상기 작동법이나 텔레비전 사용법을 꼼꼼히 적어두는 것이라든지, 다림의 사랑을 멀리서 지켜보며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다소 정적인 운명관이다.
반면 츠구미는 여름 바닷가의 햇살처럼 치열하고 열정적이다.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써놓은 편지인냥 마리아를 놀래킨 도깨비 우편함 사건이라든지, 중학교 때 자신의 병약함을 놀리던 반 친구를 향해 얼굴이 파랗게 되도록 화를 낸 일이라든지, 남자친구 쿄이치의 강아지 겐고로를 훔쳐간 남학생을 위해 파놓은 구멍, 그리고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자신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쿄이치에 대한 감정 표현 등등의 모습이 그렇다.
그리고 주변의 배려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츠구미의 모습은 더없이 얄미운 말괄량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가졌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다.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멀쩡한 사람이 어느 날 이름없는 병이나 사고로 죽기도 하고 치유불가능한 병에 걸려 수 년동안 사는 이들도 있다. 언제 죽을지 알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흔히 하는 얘기로 내일 죽는다고 하면 오늘 저녁에 나는 무엇을 할까?
마지막 츠구미의 편지는 죽음을 준비하는 이의 편지이긴 하지만 그건 츠구미 답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작가의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아니었을까?
누구나 한 번쯤은 하게 되는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 같은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