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수레바퀴 아래서'을 읽은 지 세 달은 더 지난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이제와서 그 작품에 대하여 언급하고 이렇게 쓰는 이유는
우연히 형의 고등학교 문학책에서 그 작품을 다시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서 그 작품을 다시 읽으니 (물론 아주 적은 부분이었다) 약간 다른 느낌이 들었고 아니 어쩌면 교과서에서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랜만에 다시 읽어 봤기 때문에 다른 느낌이 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지금은 방학이라서 한결 나아지긴했지만 지난 3학년 1학기 동안 학교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중학교 생활 다 끝나가는데 내가 이제와 이런 방황을 하게 된 것의 원인이 바로 이책이 었다는 것을 오늘 좀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이것이 내가 고전문학에 심취하게 된 제일 처음의 책이 었다는 것.....나를 알고 싶다면 나는 이책의 하일너라는 녀석과 흡사하다고 말하겠다. 이책의 하일너는 문학을 사랑하는 소년으로 자신감이 넘치고 자기신조가 있는 약간 예술가 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내가 왜 시를 조각조각 나누어서 그렇게나 분석하는지(학교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그냥 내 방식대로 음미하면 안되는가 왜 그 한가지 생각에 갇혀야만 하는가 ) 하일너도 신학교 교육에 의문을 품고 반항한다 한가지 그와 나의 차이점은 그는 자기의 그 생각과 신조를 확신한다는 것이고 나는 그 생각을 아직은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생각은 어쩌면 나를 파멸로 이끄는 생각 일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내가 문학을 좋아한다고 내가 좋은 작품을 쓸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관심과 적성의 차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나는 부모님이 부유하신것도 아니고 어떤 미래를 확신할만한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이러한 나의 생각을 실행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 학교에 대한 반감이나 일반 사람들에 대한 반감은 그리고 반감의 바탕이 되는 그 생각은 그 기준이 단순히 그것이 미를 추구하느냐 아니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 생각이 궁극적으로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과연 미를 추구하지 않는게 욕할 만한 이유인가 말이다)그래서 나는 학교에 대한 순응 어쩌면 현실에 대한 순응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것과 문학의 낭만 사이에서 갈등한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이책의 한스 기벤라트나 하일너 같은 꼴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고 또한 어설픈 탐미주의자가 되느니 그래서 그렇게 비참하게 사느니 보통의 안락함을 추구 하는 사람이 되고 시다는 것이다. 이런 진지한 고민 어쩌면 은근히 내가 그 어떠한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것 같기도 하는 환상을 갖게 하는 어쩌면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이고민을 유발시킨 많은 책들이 있었다 그 중 그 시발점이 된 책이 바로 이 수레바퀴아래서 라는 책이다. 그래서 나는 이책을 누구에게나 함부로 추천하지 않는다.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은 감히 헤르만 헤세의 말을 인용해서 그만의 알에서 깨어나게 될지 도 모르기 때문이다. 안락하고 확실히 아는 그 세계, 알에서 말이다. 그러면 고통스러울수도 있고 어쩌면 낭만적일 수 도 있고 잘만하면 행복할 수도 있는 알에서 깨어난 세상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