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잎새를 읽고... ◎
소설 전체에 깔려 있는 것은 가난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이 [사랑]은 존시의 폐렴으로 인해 더 깊어만 간다. 못 먹고 가난함으로 인해 저저분한 곳에서 기생하는 폐렴이 존시에게 찾아들자 의사는 존시가 살아날 가망성을 10%로 잡았다. 그리고 이 가능성은 환자의 의지에 의해서만이 바뀔 수 있다고 했다. 참으로 냉철난 직업 의식을 보인 후 의사가 떠나자, 이때부터 수의 사랑은 점차 드러났으며 이 사랑은 아랫층에 살고 있는 버만 할아버지에게 전달되었다.
버만은 실패한 화가였다. 나이 60이 되어서도 늘 평생의 대작을 꿈 꾸며 술과 더불어 살면서 젊은 화가의 모델이 되어 근근한 삶을 원하는 자였다. 그러나 이 버만에게 한 가지 냉정한 면이 있다면 그것은 젊은 자들이 미리부터 약한 소리를 하는 것만큼은 용서하지 않았다. 버만에게 있어 좌절이란 없었다. 용기와 희망만이 그 나이까지 그를 지탱해온 이유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버만의 성격은 좌절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았지만 또 그만큼 그의 아픔을 이해하는 정이 깊었던 것이다.
이 정은 비바람 몰아치는 폭우 속에서 홀로 밤을 지새며 담쟁이 잎새 한 장을 그리게 한다. 담쟁이 잎새를 자신의 운명인 양 의미를 부여한 존시는 분명 그 의미로 인해 죽음을 맞아할 것이니, 이 잎새 한 장이 주는 의미는 비록 그림이 아니라도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다른 잎새는 다 떨어져도 이 잎새만은 남았고, 또 그 다음날에도 마찬 가지였다. 그제서야 존시는 자신의 부여한 의미에 대해 깨달음을 가졌고, 수에게 식사를 요구했으며, 거울을 요구했다. 의사의 말대로 회생할 수 있는 가망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버만은 폐렴을 맞아 점차 죽음의 길로 들어섰으며, 마지막에 존시의 병이 다 낳았다는 소리와 함께 버만은 죽음을 맞이하는 묘한 차이를 이룬다.
한 평생 자신만의 걸작을 그리고 싶어했던 버만. 섣불리 그렸다가는 망칠 것 같아 내내 놓아둔 화포. 버만은 끝내 이 화포를 사용치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것도 아가씨의 꺼져가는 희망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한 조그마한 잎새 한 장을 그리고는......
그러나 버만의 잎새는 그저 잎새가 아니라 생명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버만은 이 그림으로 인해 필생의 뜻깊은 대작을 완성했으니 그의 삶은 성공한 삶인 것이다. 비록 죽음만으로 그를 슬픈 것은 아니다. 죽음이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때로는 아름다울수도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내게는 [가난]이라는 단어보다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라는 모습이 또한 오 헨리가 생각해낸 것이 아닌가... 소설의 소재로서는 흔한 [가난]을 보기드문 [사랑]을 그려내며 그의 생각이 너무 부럽다. 또 독자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마지막 문장이 주는 뭉클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