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 꽃잎으로 밥짓고 아주까리 잎으로 비바람 피하는 무슨 소꿉장난인 줄 아냐고 한심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현실론을 핀 건 가난한 남자와 결혼한 탓에 신혼살림을 달동네 별이 보이는 지붕 아래서 보낸 경험이 있는 큰언니였고...
어어어. 너 사고쳤구나.
어쩜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재미있다 재미있어, 하는 표정으로 이런 돌발사태 때문에 인생이라는 게 지루하지 않은 모양이야, 흥흥거리는 건 작은 언니였고....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식으로 아예 상대도 해주지 않는 건 어머니였어.
그러나 나는 결혼을 강행하지 않을 수 없었어. 뭐? 정말 일 저질렀냐구?
무슨 소리. 난 X세대나 신세대로 포장되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하고 사는 그런 류의 젊은이들을 경멸해.
인간답게 제대로 살려면 먼저 인간으로서 해야 될 의무와 책임을 성실히 다 해야 되는 거 아니겠어?
질서와 규범을 잘 지키고 길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 된다는 게 내 지론이야.
처녀면 처녀답게 순결을 지켜야 되는 것도 내가 지켜야 될 질서와 규범 속에 포함되어 있지.
그럼 왜 결혼을 그렇게 서두르냐구?
그거야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지.
우린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그뿐이야..
우리 -나,미미와 철수 씨- 는 소문이 따르르 난 캠퍼스 커플이야. 학교는 물론 학교 앞에 즐비하게 늘어선 찻집, 옷집. 당구장에까지....
학생이 공부나 하니 무슨 결혼이냐고 펄쩍 뛰시던 양가 부모님들도 결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는 우리에게 백기를 드셨어..
대신 학비는 졸업 때까지 대주겠지만 생활비는 한푼도 없다는 거였어.
오 예, 걱정 없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겠지요.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에 심각한 의미를 두지 않았어.
까짓 것 뭐 고기 먹을 때 된장 먹고 참외 먹을 때 오이 먹고 없으면 굶고. 이런 식이었어.
서로 등을 보이고 각자 자기 집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별의 순간을 갖지 않아도 되는데 뭐가 두려우랴..
우리는 결혼을 했고 철수 씨가 자취를 하던 방이 우리의 신혼방이 되었어.
햇빛도 잘 안 들고 눅눅하게 습기찬 지하방인데 손수건만한 창에 샤링이 많이 잡힌 물방울 커텐을 달고 창가에 색색깔의 팬지를 앙증맞게 작은 프라스틱 화분에 담아 놓았더니 제법 신혼방 티가 났어.
우리는 무릎이 맞닿을 만큼 작은 방에서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아, 결혼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알사탕을 입 안 가득 물고 있는 것처럼 달콤한 거구나 속삭였어.
아아, 오오, 황홀한 감탄사만 나오는 꿈 같은 시간이 사르르 흘러갔어.
그런데 어느 날 태풍처럼 휘익 우리 앞에 떨어진 <현실>은 결코 녹녹치 않았어.
세상에, 방세를 올려 달래나?
식구가 늘어서 전기세,수돗세,오물세를 더 내야 한다나?
전기세, 수돗세, 오물세라는 생소한 낱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갑자기 12시가 "땡" 치자 마술이 풀려 다시 잿더니 속의 아가씨로 돌아가야 되는 신데렐라처럼 슬퍼졌어.
철수 씨가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사형대에라도 끌려가야 되는 사람처럼 연신 해대는 "사랑해" 도 날 슬픔의 늪에서 건져 올리지는 못했어.
그러고 보니까 내가 좋아하는 갈비찜, 오이소배기, 냉면을 못 먹어 본 지도 꽤 오래 됐어.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염려 마십시오.
부모님 앞에서 큰소리 탕탕 쳤는데 부모님한테 손을 내밀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말 난감한 거야..
그래서 우리는 머리를 맞댔어.
어떻게 해야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회의를 한거지.
지금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만으로도 시간이 꽉 짜여 있으니 돈이 된다고 해서 아르바이트를 늘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론은 하나였어.
허리띠를 더 졸라 매는 것.
우리는 최소한의 생계비만으로 버티기로 하고 가계부지출란을 훑어 보았어.
쌀과 연탄 같은 생활필수품은 손댈 수 없지만, 안 먹어도 죽지 않는 기호품은? 우리는 동시에 소리쳤어.
"철수 씨. 담배 피지 마"
"미미야, 커피 마시지 마."
우째 이런 일이.
상대방을 위해서 자기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상대방에게 포기하라고 소리치다니.
사랑? 그거 설악산 흔들바위처럼 흔들거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나는 조금씩 겁이 나기 시작했어.
결국 우리는 공평하게 둘 다 포기하기로 했어.
철수 시는 담배를... 나는 커피를....
커피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 나는 불현듯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어.
모짜르트를 틀어놓고 커피를 마실 때 제일 행복해 보이시던 어머니.
아버지가 선장이라서 몇 개월씩 집을 비우시는 탓에 어머니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셔야 했어.
빈틈없니 알뜰하고 검소한 어머니셨지만 커피잔에는 아낌없이 돈을 쓰셨어.
어머니의 커피잔은 어머니에겐 가장 호사스러운 소유물이었어.
어머니는 커피를 단숨에 마시는 짓 따위는 하지않으셨어.
언제나 커피잔을 두 손으로 포근히 감싸고 조금씩 음미하듯이 마셨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생각했어.
어머니는 따뜻한 커피잔으로 언 마음을 녹이고 천국처럼 달고
지옥처럼 쓰고 용광로처럼 뜨거운 한잔의 커피잔으로 단단하게 응어리진 외로움의 덩어리를 잘게 부수고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권태로운 주부의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구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우리 세 자매는 모두 커피를 좋아했어..
커피 타임을 정해 놓고 두 언니랑 커피 마시며 담소하는 시간이 무엇보다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난 철수 씨와 결혼하고 나서 커피를 더 많이 마셨어.
눅눅한 지하실 방에 짜증이 나려고 할 때마다 커피를 마셨어.
어머니처럼 눈을 감고 모짜르트를 들으며 커피를 마셨어.
그러면 갑자기 내가 부자가 된 것 같아.
기름진 들판에 서 있는 듯 마음이 풍요로워져.
때로는 나한테 최면을 걸기도 해.
아, 나는 지금 학교 앞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라든가 알프스산 아래 작은 통나무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라든가, 커피 한잔으로 난 어디든지 갈 수 있어.
그런데 생활비 절약이란 명목으로 환상여행을 그만 두라고?
나는 철수 씨에게 선언하고 싶었어.
철수 씨, 커피는 내게 단지 기호품이 아니야.
청량한 바람, 따뜻한 햇살 같은 거야, 눅눅하고 어두운 지하실 방에서 날 견딜 수있게 해주는 건 물론 사랑이고 그 다음엔 커피야. 이해할 수 있겠어?
그러나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어.
철수 씨도 담배 끊기 힘들었을 거야. 오죽하면 폐암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담배갑에 경고 안내문을 집어 넣어도 남자들이 죽기 살기로 피울까?
철수 씨도 담배를 끊었는데 나도 뭔가를 보여줘야지.
그래야 철수 씨도 기운이 날 거 아니야.
사람들은 사랑을 너무 거창하게 말하는 버릇이 있지만 사랑도 결국 치약 같은 거 아닐까?
언제나 꽉 차있는 게 아니라 소모되는 것. 그래서 부지런히 채워넣어야 되는 거.
내가 할 수 없는 건 상대방한테도 시키지 말아야지.
일방적인 건 안되잖아?
철수 씨는 담배를, 나는 커피를 끊었어.
현실에 등 떠밀려 단호하게. 아, 커피 마시고 싶어 미치겠구나아.
나는 그런 내 마음을 들킬까봐 조바심치며 하루하루를 잘 견디어 나갔어.
철수 씨도 아, 담배 피고 싶어 죽겠구나아 하는 듯 이유없이 서성대는 모습을 많이 보였지만 그럼 대로 잘 버티어 나갔어.
결혼은 연애와 달리 현실이라는 걸 난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어..
담배와 커피가 우리의 공간에서 사라진 이후부터 이상하게 우리는 부부싸움을 자주 했어.
도대체 싸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하찮은 일에도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였어.
"환기도 안되는 작은 방에서 자꾸 방귀를 뀌면 어떡해?
여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기가 막혀서. 내 방귀는 소리만 크지 냄새는 없어.
철수 씨 방귀는 어떤 줄 알아?"
"반찬이 왜 이렇게 짜니?"
"짜야 오래 먹을 수 있지."
"텔레비젼 볼륨 좀 줄여. 나 지금 리포트 쓰고 있단 말이야.
무식한 여자처럼 연속극에 코를 박고 있으니...쯧쯧."
"그래, 난 무식하다. 유식한 넌 코미디프로만 나오면 나사 빠진 사람처럼 낄낄거리니?"
매사가 이런 식이었어.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어떻게 해야될지 엉킨 실타래처럼 속수무책이었어.
어느 날 작은언니가 커피 한 병과 프림 한 통을 사들고 우리집에 놀러왔어.
"사랑이 좋긴 좋은 모양이구나. 바퀴벌레 한 마리만 봐도 잠을 못 자고 유난을 떨던 네가 이런 데서 잘 견디니."
작은 언니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이 말을 남겨 놓고 약속이 있다며 가버렸어.
나는 작은 언니가 놓고 간 커피병과 프림통을 보면서 허기를 느꼈어.
그래... 허기..
그래서 허겁지겁 가스불 위에 주전자 물을 올려 놓았어.
얼마 만인가?
첫미팅에 나갈 때처럼 가슴이 설레이며 콩닥콩닥 뛰는거야...
그러나 나는 찬장에서 현실을 봐야했어.
식용유도 떨어졌고 진간장도 떨어졌어.
나는 가스불을 끄고 커피병과 프림통을 끌어안고 밖으로 나왔어.
사정을 하면 맘씨 좋은 동네 슈퍼마켓 아줌나는 이 커피와 프림을 식용유와 간장으로 바꿔주겠지.
학교에서 돌아온 철수 씨에게 나는 내가 얼마나 알뜰한 주부가 되어 있나 뽐내듯 말했어.
"작은언니가 사온 커피하고 프림을 동네 슈퍼마켓에서 식용유 두 병하고 진간장 세 병하고 바꿨어."
잘했다고 칭찬해 줄 줄 알았던 철수 씨가 아무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야..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빛으로..
다음날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났어.
철수 씨가 커피와 프림을 사들고 집에 들어온 거야.
"내가 잘못 생각했어. 미미야.. 커피 마시면서 살아.
넌 이제 겨우 스물둘이야. 커피하고 식용유하고 바꾸기엔 너무 젊고 아름다운 나이야.."
"철수 씨."
공연히 콧등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핑 도는 거야..
"조금만 참아.. 다 해줄게."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어......
*정말 이뿐 사랑이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이 아끼는 그 무엇이든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