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야기
우리집 담벽이 올해도 8월 한달 나팔꽃으로 가득하다.비록 아침일찍 피어 정오가 되기 무섭게 지고마는 아쉬운 꽃이지만, 피어있는 동안만큼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 아침에 일어나 이것들을 바라만 보아도 기분이 상쾌해 진다.
나팔꽃의 성장력은 놀랄 만 하다. 하룻 사이에도 거의 한뼘가까이나 뻗어가고 있다.지열이 느껴지는 늦봄에야 더디게 순을 틔우더니 뻗어갈 때에는 갈길이 멀다는 듯 줄다름을 쳐 불과 두어달 사이에 온 담벽을 연초록 이파리로 뒤덮여 놓아 버렸다.
담벽이 덮이고 나니 우선 좋은 점이 두가지다. 잎파리 사이로 얼굴내밀고 피어나는꽃의 자태를 감상하니 좋고, 이웃집과 차시막(遮示幕)이 되어주니 좋다. 애초에 나팔꽃씨를 화단에 뿌려놓고 담벽을 타고 오르라고 대막대를 설치한 목적도 거기에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맨손체조를 하려고 마당에 내려서서 심호흡을 하고있자니까 이웃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2층 창문을 통해 빼꼼이 내려다고있는 것이었다. 얼른 눈길을 거두는 것으로 보아 고의적인 행동으로는 생각되지는 않았으나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애시당초 그런걸 예상못한 것은 아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집을 지으려 할 때 창문을 우리집 쪽으로 내는 것을 반대 했었다.그러나 집주인은 설계가 그리되어 어쩔 수 없으니 대신 보안을 하겠노라고 통사정을 하는 바람에 승낙을 해준 터였다. 그런데 끝내 약속을 어기고 만 것이다.
그런 뒤끝이라 더욱 언짢았을까.한데, 그후부터는 아쉬운 사람은 내가 되어 '목마른 사람이 새암을 판다'는 속담대로 내가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아니 될 처지가 된것이다. 하여 궁리 끝에 심게 된 것이 이 나팔꽃이다.나팔꽃이 뻗어 가는 모습을 보면 마치 순 끝에 눈이라도 붙어 있는 듯이 보인다. 머리를 치켜들어 나아갈 방향을 살피고는 우측으로 새끼꼬듯 질서정연하게 뻗어 가는 품이 제법 능숙하다.
식물이라도 살길을 찾아가는 모습이 대견스럽기 짝이 없다. 제 소성에 따라 눈을 틔우고 줄기를 뻗으며 꽃을 피우는걸 보면 하찮은 것이지만 절로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집 조그만 화단에는 이 밖에도 민출란과 할미꽃이 심겨져 자라고 있다. 민출란은 겨우내 푸르름을 간직한 채 월동을 했다가 봄이되면 분얼을 하면서 꽃대를 올리고, 할미꽃은 해동이 마악 진행중일 때 가장 먼저 새싹을 내밀기 시작하여 그후로는 더디게 솜털을 달고 자라난다.
내가 나팔꽃 이외에 이 두종을 더 아껴 기르는 것은 이것들이 피어내는 꽃들이 아름다워서다. 민출란은 작은 꽃이 향기가 진하고, 할미꽃은 자태가 아름다울뿐 아니라 노고초(老姑草), 백두옹(白頭翁)으로 불리우듯 사람의 한생을 보는 듯 하여 좋아한다.그리고 이것들이 벼가 읶으면 고기를 숙이듯이 그렇게 꽃을 피워 정감이 더 간다.
나는 많은 꽃중에서도 소박한 꽃, 그 중에서도 되바라지지 않고 수줍은 듯한 꽃을 좋아하는데, 해바라기나 모란, 그 밖에 장미등은 언뜻 보기에는 매혹적이고 정열적으로 보이나 오래 마주하고 있으면 거부감이 인다. 그러나 앞서말한 꽃들은 다소곳이 피어나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고개쳐들고 과시를 일삼고, 남이 알아주든지 않든지, 욕을 하든지 말든지 게의치 않으면서 억지로 아는체, 잘난체, 가진체,힘있는체 ,하는걸 보게되면 금방 싫어지고 경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갖추고도 고개 숙이고 겸손하게 행동하면 웬지 다가서고 싶고 신뢰감이 절로 든다.삶의 이치가 이러한 데도 그러나, 세상일에는 정반대의 현상이 대접받아 자리 잡혀져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과시를 해야하고, 부풀려야만 믿어주니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머리속은 텅텅비어 있어도 옷을 번드르하게 차려 입어야 신사로 대접해 주고, 차도 고급 승용차를 굴려야 사람대접을 해준다.
특히 대출을 받거나, 호텔을 이용하려면 좋은 차를 몰고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딱지 맞거나 괄시받기 십상이다. 현실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세상이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 가고 있음이다.그런것들이 싫어서 나는 꽃이라도 보다 다소곳한 꽃, 은근하게 안겨오는 꽃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나팔꽃이 비록 피어서 한나절을 채 넘기지 못하고 지고말지만, 그 피어나는 모습이 정숙하고 소박하니까 좋다. 나는 요사이 옛사람들이 방풍(防風)을 위해 심었던 나무가 좋은 전경을 이루어서 보여주듯이 비록 차시막을 위해 심은 나팔꽃일 지라도 이를 감상하면서 삼복의 무더위를 피하고 있으니 더없이 아름답게 보이고,이 꽃들 속에서 한때나마 기쁨을 느끼니 더없이 좋다.(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