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 양반아! 어째 그리 무심한가"
오랜만에 그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고향은 많이 달라져 있다고 그는 느낄 것이다. 고향의 터주대감 격인 늙은 노인네가 제일먼저 나와 그를 반겼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네를 기다렸는지 아는가? 쯧쯧쯧"노인네는 너무나 그를 그리워했었는지 만나자마자 대뜸 혀를 찬다. "그래도 다행일세. 이제라도 와주니 사람들이 한 숨 놓겠어" 그는 슬쩍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도 반가운 내색을 짓는 것이 그들과 고향이 많이 그리웠나보다. 허리가 휘어 서있기도 힘이 들어 보이는 노인네는 보자마자 앉을 기색도 없이 낡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그를 붙들고 그가 없었던 동안의 이야기를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놓는다. "자네가 오기 전에 젊은 놈이 들렸다 갔는디 못되기는 놀부보다 더 하고 성깔하고는 정말 사람들 속 창시를 들끓어 놓는 당께! 아주 보고있으믄 환장해 뿌러. 기운 없는 사람을 괴롭혀 놓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니질 않나. 언젠가는 지가 성질 나 놓고 우리한테 화를 낸디 담날인나 본께, 우리 마을 논이며 산이며 전부다 휩쓸어 뿌러서 한해 동안 땀 뻘뻘 흘려감서 지은 나락이랑 과일이랑 다 날려 부렀당께. 힘도 장사여서 아무도 못 건들어. 다행히 이제 살기 힘들었는가 딴대로 가뿌렀는디 농사 망친 것 다 어쩔랑가 몰라. 휴 자네가 쫌만...아니네 아니여."'자네가 쪼그만 빨리 왔어도 이런 일은 없을 터인디...아니여. 다 그놈 때문이지..'이 말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노인네는 그에게 말하려고 여러 있던 일들을 즐비하게 얘기했지만 진정 중요한 얘기는 오랜만에 찾아온 그에게 하기가 곤란했는지 말을 얼버무린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는 그를 데리고 노인네는 집안 삐거덕거리는 평상에 앉아 허리를 한번 펴고는 목이 말랐는지 혀로 입가를 지워내며 쩝쩝거린다. "그래도 과일농사 안 짓기를 천만다행이여. 그 젊음놈 아따! 자네 오기전 그놈. 그놈이 과일이랑 먹는거라면 환장을 해 뿌러갖고 돈 안내고 먹으려고 지 힘쪼간 세다고 힘으로 다 뺏어 뿔고 나중에 보면 달려있는 것도 성한 놈이 있겄어. 다 모자란 것만 나누고 따가 버린거제. 그래도 그놈이 고추는 덜 손댔는지 우리 집 고추는 올해 들어서 잘된것이여. 딴 집들가봐! 저런 고추있나. 딴 데는 우리집 고추랑 비교도 안 되뿌러!"올해 농사가 잘 되지 않은 것을 한탄하면서 노인네는 평상에 널린 빨갛게 물든 고추를 보며 은근히 자랑하는 눈치이다. 그는 노인네의 말을 듣고 씁쓸한 바람한번 불어본다. 시원한 바람이 마을 구석구석에 그의 흔적 한올한올 풀어놓는 듯 하다. "이럴 것이 아니라 오랜만에 왔는디 동네 한바퀴 돌고와봐. 얼마나 변했는지 그래도 보고 와야 할 것 아니여."노인네는 그의 등을 떠 밀어본다. 그는 조용히 마을 어귀에 나가서는 한참동안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마을앞 쓰러진 벼들의 황폐함이 그의 입속에서 쓴 물이 나오게 했다. 그래도 뭐가 그리 좋은지 가끔씩 웃어 보이는 그의 미소는 햇살에 빨갛게 잘 익은 물렁물렁한 홍시 같기도 하고, 고개 숙인 벼 사이를 가을 내음 풍기도록 흔들어 대며 가로 지르는 시원스런 산들바람처럼 마음을 감싸 앉는 듯 했다.
한지사이로 살랑이는 바람이 들어와 삐거덕삐거덕 문을 두드린다. 그 동안 곤히 깊은 자에 들어 꿈을 꾸던 노인네가 가을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밖에 누군가가 온 듯해 막 일어난 설 눈을 비벼대며 문은 활짝 열어 재 쳤다. 좁다란 한지 문으로 몰려들어오는 바람이 온 방안으로 향내를 풍기며 들어왔다."가을이 왔나보구나! 꿈에서는 얘기한번 안 하더니 잘 왔다!"노인네는 밖으로 나와 평상에 널어진 빠알간 고추를 어루어 만지며 가을 냄새를 한번 들이마시자 노인네의 굵은 주름살 사이로 진한 국화향같은 향긋한 미소가 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