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유명한 사슴 사냥꾼(Deer Hunter) 있었습니다.
그날도 그 사냥꾼은 자신의 사냥개 50마리를 이끌고
산으로 사냥을 나갔습니다. 사냥은 하던 중, 그는 우연히
아르테미스 여신이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훔쳐보게 됩니다. 여기서 목격은 운명적인 것이고
훔쳐보는 것은 자의적이랄 수 있겠죠.
그러나, 그거야 어쨌든 여신의 눈과 귀는
사람의 여늬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당장에 들켜.
그 사슴 사냥꾼은 여신의 주문에 의해 숫사슴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숫사슴이 자신들의 주인인 줄 모르는 자신의 사냥개
50마리에게 갈가리 찢겨 죽는다는 게
그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좀 섬찟합니까? 그러나 다시 냉엄하게 객관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신화의 요소가 빠짐없이 두루 갖춰진
평범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모든 신화 읽기가 그렇듯이 그런 가상적인 이야기
내용 중에 감춰진 진실 읽어내기는 항상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는 항상 어떤 목적을 위해 움직입니다. 어떤 것이든
그 무엇을 위해 어떤 일을 하게끔 운명 지워진 것은
어쩌면 저 신화에서와 같이 사냥꾼과 사냥물 사이에 있는
사냥개를 모체로 하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동일한 어떤 시스템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어느 목표를 위해 무엇을 하지만
그 목표가 우리를 괴롭히는 원인 제공을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가 하나
남습니다. 과연 우리가 괴롭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과연 진실로 우리에게 총체적으로 고통이나 주는
그러한 시스템적인 모순이냐?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단지 고통이 아니라, 인과응보라고 하는 거대한
수레바퀴 속에서, 오늘도 그 원인과 결과를
하나의 행동으로 제공하는 우리들의 참모습인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은 죽음이라 해도 추한 것이 아닐겁니다.
그 죽음이란 결과는 또한 다른 어떠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으니까요.
저 Ovid의 "전신부"에 나오는 사냥꾼의 이름은
악테옹(Actaeon)입니다. 오늘도 그 무엇을 위해서
크든 작든 어떠한 일을 도모했던 적이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생물, 무생물은 그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Family Name이 바로 악테옹(Actaeon)이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