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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다사랑
날짜
:
2000년 10월 26일 (목) 9:13:50 오전
조회
:
1133
2000/10/26
친구야
항상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던 너
난 아무 걱정이 없어 보이던 네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누구 보다도 총명하여 별로 노력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매일 책만 들여다 보고 있던 나보다 성적도 좋고, 그렇다고 너는 남과 경쟁을 하지도, 교만하지도 않았어.
오히려 어딘가 모자라 보이기도 했고, 실수도 잘 했고, 문맥과 상관 없는 엉뚱한 소리를 해대기도 했지.
요새 같으면 사오정이라고 놀렸겠지만 오히려 우리는 너의 그런 모습 때문에 너를 좋아 했었지. 훨씬 인간적으로 보였으니깐.
너 같이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는 아이가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참 이상했어.
우리는 네가 너보다 더 뛰어나 보이는 언니들 때문에 네가 너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넌 항상 그렇지 않다고 했지. 너희 언니들은 너를 도와 주는 사람이라고.
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한 아이가 그랬었어.
어머닌 쟤가 너무 예뻐서 하나님께서 그러셨나 봐요.
검은 실로 잔뜩 단장한 얼굴로도 그 얘길 듣고 웃더구나.
너희 엄마도 그렇고
그런데 넌 나중에 그랬지.
네가 나를 부러워 했었다고.
좋은 아버지랑 사는 것이 부러워서 나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나와 우리랑 친하게 되었다고.
어느날 넌 알아 버렸는데, 아주 후에 알아 버렸지.
아빠와 엄마는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이혼을 하셨고
난 아빠와 사는 내내 엄마가 그리워 어느 날 엄마에게 갔는데
아침 일찍 우리 엄마 방에 엄마 공장의 공장장 철수 아저씨가 앉아 있는 것을 네가 보았을 때, 또 내가 제일 좋아하던 애에게 나의 모든 것을 주고도 내가 제일 아끼는 친구에게 빼앗겼을 때,
난 내 몸에 칼을 대었고, 그 때 너를 불러서
칼이 몸에 안 들어 간다고 했었지
넌 정말 너무나 순진해서 그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을 거야
사고가 난 후에 넌 모든 것을 알았던 것 같더구나
나는 거짓말로 어린 시간을 보내 왔고
많은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그 재능을 제대로 키워 보지도 못했고
남보다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위했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나를 떠났고
난 술집에서 일하는 못생기고 뚱뚱하고 미래가 없는 늙은 소녀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내가 그 후에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서 애기 엄마가 되었고 너를 만나고 싶었는데 너는 약속 장소에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2000/10/26
검정 오바에 흰 목도리, 검은 테의 안경.
그것이 너의 첫 모습이었어.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오게 생겼다고 생각했었지
넌 참 재미있는 아이였어
어떻게 하루에 두 개의 서클 모임에 갈 수 있었는지
그것도 하나는 운동권 서클에
또 하나는 부르조아 서클로 유명하던 그 곳에
많은 애들이 하나를 선택할 때 너는 모든 것을 다 잡으려고 했던 것 같아
마치 큰 아이를 제물로 바치겠는가 아니면 작은 아이를 바치겠는가라고 묻는 이교도 제사장
앞에서 두 아이를 끼고 우는 엄마처럼
우리 과의 아이들이 패를 갈라 공부하는 아이들 끼리, 잘 사는 아이들끼리, 어울릴 때에 너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그러지 못하겠다고 했었지.
그 덕인지 넌 정말 아는 아이도 많았고 네 결혼식장은 그 여러 부류의 아이들로 북적거렸었는데,
남편과 함께 미국에 간 이후로 감감하더니
지금도 대전 어딘가 살고 있었다는 말만 들었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구나.
어쩜 그렇게 사라질 수가 있는지
널 본 아이들은 너의 그 고운 모습도 밝던 모습도 세계의 평화를 사랑하는 모습도 모두 없어지고, 회한 만이 남아 있더라고 하더구나.
무엇이 널 그토록 변하게 했는지.
왜 너의 영특함이 사라지고 좌절이 자리 잡고 있고.
항상 친구들의 말에 귀길울이며 정색을 하고 보던 그 똘망똘망하던 눈은 힘이 없어지고 눈물만 고이는지
왜 너의 그 에너지는 사라지고 아직 젊은 나이에 어깨가 구부정하고 자꾸 아프고 힘이 든다고 했다면서
넌 마치 외계인에게 납치된 사람처럼 우리 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
다시 보고 싶구나.
너의 그 해맑게 웃던 그 모습이.
남의 일에도 곧잘 흥분하며 네 일처럼 나서던 그 모습이
우리 나라가 많은 차관 속에서 무역 경쟁 때문에 허덕일 때에도 세계의평화를 부르짖던 그 모습이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를 외치던 그 모습이
선생님은 그렇게 열정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시면서 왜 본인은 아니라고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속에 얼마나 큰 사랑이 큰 창의력이 있는지 선생님은 모르시는 것 같아요. 물론 선생님이 실수를 잘 하고 시간 관념이 부족하고 책임감도 부족하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요. 그렇지만 학교에서 당신이 그런 모습을 보이신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모르시는 것 같아요. 당신 보다 더 엉성한 분들 중에서는 아예 미안해 하지 조차 않는 사람이 더 많다는 걸 모르시나 봐요. 학생들은 선생님이 매사에 능하고 빈틈 없고 모든 생활을 아주 성공적으로 잘 이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선생님을 모델로 삼기도 해요. 게다가 학생들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학생들이 힘들어 할 때 우리 같은 사람처럼 경멸하지 않고 오히려 선생님의 교수 방법을 탓하면서 안타까와 하고 애쓰는 모습이 우리에게 얼마나 아름답게 비추어지는지 아세요? 또 내가 힘들 때에도 날 위로해 주시고 도와 주시고 그런 분은 그리 흔하지 않아요.
선생님이 죽음의 유혹을 느낀다고 했을 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몰라요.
그 아름다운 미소와 사랑과 열정 속에 왜 죽음에 대한 유혹이 스며들어 왔는지
선생님을 어떨 때 보면 겸손하다 못해 비굴해 보일 때가 있어요.
어깨를 펴세요. 선생님은 이제껏 최선을 다 해서 살아 왔잖아요?
선생님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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