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수행평가로 낸건데요;; 나름대로 정성을 들였으므로^^;
-----------가을바람-------------
우리가 바라는 참 된 민주주의, 그리고 인간의 불평등을 부르짖던 공산주의 혁명의 처음. 인간의 불평등의 기원이 함께 일하고 싸우던 과거의 우리 인간에게 있듯, 결국 사회를 억압하는 불평등의 해안은 언제나 인간에게 있다.
하퍼 리[Lee, Harper, 1926~]의 ‘앵무새 죽이기’란 이 작품의 제목은 작품 내에 등장하는 아이들이 장난삼아 앵무새 사냥을 하려는 것을 가리킨다. 핀치는 아이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앵무새를 죽이는 것은 나쁜 짓이라고 일깨우는데, 여기서 앵무새는 인종차별적인 편견에 의해 누명을 쓴 채 끝내 죽음을 당하고야 마는 로빈슨 같은 힘없는 유색인종이나 소외 받는 가난한 사람 들. 즉, 죄 없는 타자(他者)의 상징이며 그들의 얼굴이다.
이 힘없는 앵무새를 위한 외로운 투쟁, 모든 백인들의 힐난과 법의 불공정함에 당당히 맞서 에티커스는 로빈슨의 무죄를 변호하고 나선다. 두 백인 아이의 아버지 애티커스. 흑인의 인권을 위한 그의 투쟁을 우리는 흔히 인종 차별이라는 인간 불평등에서 그 끝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백인 에티커스가 말하는 흑인들을 위한 인권 투쟁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이 책의 언어인 핀치가 학교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집에 돌아와 이 사실을 털어놓고 고민하자, 에티커스는 백인들에게 인간적 차별과 사회적 폭행을 받는 흑인들에 대한 사랑과 그 필요성을 핀치에게 일깨워준다.
외로운 에티커스. 백인 변호사인 그가 사리(私利)를 포기하고 흑인들을 선택하는 모습은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의 본래의 모습,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인 것이다.
이를 통해 본다면, 한국의 사회 역시 이 맥락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식민시대 일제 역사가들의 사회관인 당파싸움이라고까지 불리는 국회의 암묵적인 분쟁과 노사 간의 갈등. 학력 중심 사회의 병폐로 인한 사회 제반의 문제와 빈부의 갈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현실적 문제를 40년 전의 에티커스는 그의 의지와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독재자는 무너졌고, ‘문민‘라는 이름을 가진 정부가 출범했다. 이 땅에 민주주의가 시작된 지 이제 10여년이 흘렀다. 과거의 우리가 죽여간 공산주의도 결국은 인간 불평등이 그 기원이며, 우리는 그 기원이 과거의 우리에서 비롯되어진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의 우리와 지금 이 땅에 숨쉬고 있는 우리들은 결국 모두 40년 전의 에티커스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 동안의 우리를 이끌어 온, 에티커스가 정면으로 승부했던 그 인간의 사회는 일종의 편력(偏力)이다. 흘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며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은, 돌고 도는 역사의 특징이라는 이름 앞에 온전한 죽음이 되어버렸고, 사상이라는 가장 참담한 비운으로 남았다.
결국 힘 앞에 굴복해야만 했던 흑인들도 지금의 우리에게는 온전한 죽음으로 남았지만, 그 온전한 죽음의 앞에 그들을 열렬히 끌어안은 에티커스야말로 어두운 사회의 담벼락에 영원히 남을 강렬한 횃불인 것이다.
살아있는 에티커스를 위해, 푸시킨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은 돈이 아니다. 항상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은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사회의 악(惡)과 개인의 선(善), 작은 싸움이지만 에티커스의 자기 자신, 백인들에 대한 거센 항거는 우리 사회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세상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오래된 영웅(英雄)과도 같은 것이다.
지금의 우리를 한번 돌이켜보자. 혹시 우리가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무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우리가 사회의 악(惡)이 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과거의 우리가 비판하고 싸워왔던 것들이 만약 틀림없는 정의(正意)였다면, 우리의 심장 속에는 에티커스가 살아 숨쉬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나와 너를 위해 싸워왔고, 과거의 우리에게는 에티커스가 분명 있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