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의 {깊은 슬픔}을 두 번째 읽었다. 처음 이 소설을 읽은 것은 구십
사년의 봄이었다. 책이 막 출간되었을 때. 소설의 첫 부분처럼 그 때는
꽃 향기로 세상이 아득하던 봄날이었고, 나는 멀리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닿지 못하는 그리움에 봄을 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소설에 의지하여
그 봄을 견뎠다. 5년 만에 다시 읽고나니 두 번 읽어도 좋구나, 하지만
그 때와는 또 다르구나, 하는 걸 느낀다. 이 번엔 여성소설을 연구하는 사
람으로, 신경숙이라는 작가에게 더 다가가기 위한 목적의식이 있었다.
두 번 읽어도 좋은 걸 보면 꽤 괜찮은 소설이다.
신경숙의 소설에서는 사람에 대한, 생명에 대한 간절함이 느껴진다. 은서
와 이수, 은서와 화연은 상대를 극진히 아껴주고 깊숙한 내면으로 닿아있
는 관계들이다. 신경숙의 소설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정성을 들여 밥상을
차리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이럴 때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챙겨주는
행위는 상대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고 음식을 통해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고
자 하는 보살핌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이러한 보살핌은 보통 어머니가 자
식들에게 베푸는 것으로 정형화되어 있지만 신경숙의 소설에서는 어머니의
보살핌뿐만 아니라 친구들간의 보살핌, 누나나 언니, 오빠와 동생간의 보
살핌으로 확장되어 나타난다. 여성에게만 부담지우는 가사노동의 부당함
에 대해 그것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있겠
지만 신경숙은 이렇게 다양한 관계들로 그것을 확장시킴으로써 다른 식의
면모를 보여준다. 물론 그것이 사회문제를 건드리고자 하는 신경숙의 의식
적인 선택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 간의 좋은 관계에 대
해 성실히 파고드는 그녀의 글쓰기가 결국에는 여성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
는 것 같다.
소설 속의 은서는 끊임없이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리라 기대했고 끝내는
이런 말을 남기며 생을 놓아버린다.
"너는 너 이외의 다른 것에 닿으려고 하지 말아라. 오로지 너에게로 가는
일에 길을 내렴. 큰 길로 못 가면 작은 길로, 그것도 안되면 그 밑으로라
도 가서 너를 믿고 살거라. 누군가를 사랑한다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며 살거라"
은서와 완과 세, 그들의 관계가 서로 어긋나버린 것은 마음 속에 상대방의
자리를 너무 크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 자신을 지켜주리라
는 기대는 부모 자식간에도 실현되기 힘든 것인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
인에게 너무 많이 건 것은 아닌지.
순전히 나에게 무게를 두고, 타인과 어느 만큼의 거리를 두면서도 서운함없
이 오고갈 수 있는 그런 관계는 말만큼 쉽지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엔 그렇게 꿋꿋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그런 인물을 찾을 수
있을 때가 올까? 찾았으면 한다.
신경숙은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이면서도 또 그만큼 많은 투덜거림이나 비
난, 질책을 받는 작가이다. 물론 나는 그의 사진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모든 글쓰기 방식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이를 테면 이 소설에서 자주 사용되는 '나,00했네'라는 표현은 너무 유치
하게 느껴지고, 때로는 남녀 간의 사랑에 지나치게 빠져드는 듯한 내용이
거슬리기도 한다.
하지만 나 또한 그녀 소설 속의 여성들처럼 무언가에 주저하고, 먼 데를 바
라보게 되고, 따듯함을 간절히 바라는 모습을 갖고 있기에 그녀를 편애하
고픈 마음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녀가 아주 먼 시간들을 지나 쓰게 될
소설은 어떤 것일지 기대가 된다.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어떤 면에선.
그리고 나도.. 달라져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