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Emil)을읽고
<<에밀1762은 1758년부터 몽모랑시 마을의 몽루이라는 작은 집에 은거한 루소가 뤽상부르 원수의 후원으로 <<신 엘로이즈1761, <<사회계약론1762 과 함께 내놓은 책이다.
<br/>작가인 루소는 1712년 프랑스 태생의 한 시계공의 아들로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자마자 사망하였고 그는 아버지의 밑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자랐다. 그가 열살 되던 해 사소한 싸움으로 아버지가 제네바를 떠나게 되어 목사에게 위탁되었다가 숙모의 집에 유숙하면서 고달픈 나날을 보냈다. 1728년 16세에 프랑스를 향한 방랑을 시작하고 1732년 사보이 지방에서 후원자인 바랑부인을 만나 집사로 일하면서 철학자, 문인, 음악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할 기회를 얻는다. 이때부터 1740년까지가 그의 생애 중에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다. 30세 때 파리에서 디드로를 만나 <<앙시클로페디를 중심으로 모인 지식인 집단 '철학자들'에서 중심역할을 하고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를 작곡하여 왕과 왕실로부터 인정받기도 했다. 37세 때 반종교성향의 글로 구속된 디드로를 만나기 위해 뱅센으로 가는 도중 디종 아카데미 현상 모집 제목을 보고 1750년<<학문 및 예술에 관한 논문-학예론을 발표한다. 이 논문은 인간은 본래 선하지만 사회와 문명 때문에 타락했다는 그의 사상의 중심주제를 잘보여준다. 5년 뒤 디종 아카데미의 질문에 답하는 2번째 논문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완성한다. 이것은 <<학예론의 맥을 잇고 있다. 그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인류생활 초기단계에서 재구성했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건강하고 행복하고 착하고 자유로우나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면서부터 악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본래의 신교(칼뱅이즘)로 개종하였다. 그는 갖가지 사건을 거치면서 디드로와 결별하고 백과사전파 특히 볼테르의 적이 되기에 이르른다.
<br/>1758년<<에밀의 출판은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파리의 고등법원은 이책을 압수하여 태울 것을 결정하였고, 루소는 체포를 면하기 위해 몽모랑시를 떠나야만 했다. 그는 제네바로 가려 하였으나 제네바 시의회도 <<에밀과 <<사회계약론을 규탄하였다. 그는 모티에에서 3년간 피신해 있으면서 <<산에서 쓴 서한 등을 썼다. 1765년 9월 모티에를 떠나 생피에르 섬으로 피신하였으나 그곳에서도 견디지 못하고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초청으로 영국으로 건너갔다. 흄은 그를 도와 조지 3세에게 연금을 받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루소는 영국 지식인들이 자신을 조롱하고 있고 흄도 마찬가지라고 의심했다. 그는 여러 가지 정신분열증 징후를 보였으며 마침내 이름을 숨긴 채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 1768년 56세의 나이로 동겨녀였던 테레즈와 결혼했다. 마지막 10년 동안 루소는 주로 적들의 비난에 대해 자신을 정당화하는 자서전적 글을 썼는데, 가장 중요한 책은 <<고백록이다. 또 적들이 씌운 혐의에 답하기 위해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썼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는 초기의 강렬한 열정이 온화한 서정성과 진지함으로 나타난다. 그는 말년에 정신적 평온을 얻었고 프랑스 대귀족 콩티 공과 지라르댕 후작의 영지로 피신했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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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은 루소의 교육철학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 루소의 삶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루소의 에밀을 읽어보며 그의 교육론과의 관계에는 매우 특이하고 역설적인 부분들이 있는데, 가장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는것은 루소 그 자신은 전혀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같은 교육의 결여야말로 그에게 교육론의 연구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하였고, 자신이 받지 못했던 이상적인 교육과 교사의 상을 그려내게 한 것이 아니가 생각된다. 또 하나 그로하여금 교육론에 집착하게 한 동기는 그의 아이들이 아닌가 싶다. <<에밀에서는 아동의 어린시절 부모의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고 있지만 테레즈와의 사이에서 낳은 다섯 자녀들을 모두 고아원에 맡기는 등 이해하기힘든 면모를 보인다. 당시 사정으로 보아 그같은 기아는 흔히 있을수 있는 일이었을까? 하지만 루소 자신은 이에 심각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고, 그로 인해 <에밀과 <고백론을 통해 참회 해보고 싶은 속죄 의식을 느꼈던 것 같다.
<br/>≪에밀≫은 루소가 그의 인간관과 문명비판을 가장 집약적으로 전개함과 동시에 그의 내부의 첨예한 사상가적인 통찰과 상상력과 감정이 풍부한 시민적인 소양의 양면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에밀은 작품전체가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에밀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아이의 성장발달 단계에 따라 탄생부터 청년기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다섯단계로 나누어 교육하고 있다. 그리하여 각 단계에 적합한 루소의 교육이론이 제시되어 있다.
1부에서는 출생에서 5세까지의 교육에 대하여 논하고 있으며 가장 강조되는 부분은, 어린아이의 감각을 통한 경험들이 그의 사고의 원료가 된다. 그러므로 그런 경험들은 순서에 맞추어 아이들에게 제공되어야한다'고 쓰고 있다. 또한 그는“창조자의 손에서 나올 때는 모든 것이 선하였지만 인간의 손을 거치게 되면서 모든 것은 타락하였다.”라고 하였다. 제 1단계에서는 우선 신체의 발육이 중요하다고 나와있다. 그러나 이시기의 양육방법은 자연질서에 따라야 함을 강조하였다. 만약 어린이가 오류를 범하였을 때 사물 그 자체가 벌을 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사물의 필연적 질서에 복종하는 것은 인간 질서에 복종하는 것과는 달라 노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물과 사물간의 의존관계는 필연의 질서를 갖는 것이지 도덕성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악으로 이끌림이 없다. 그것은 자유를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정신을 육성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소의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이 가르치는 자연적 자유인 것이다.
2부에서는 5세에서 12세까지의 교육에 있어 이 기간동안의 五官의 기능을 충분히 개발해야 됨을 강조하고 있다. 제 2단계의 교육 또한 자연에 의한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이 시기에 발달하는 감각기관의 훈련이 신체적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이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이때 어린이를 둘러싼 환경은 자연에 접할 수 있는 전원 풍경이어야 하고, 이 자연환경을 유일한 교육의 장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책을 통해서 감각훈련을 하거나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유해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에 의한 사물교육은 곧 자연주의 교육인 것이다. 그는 그 어느 때나 어린이는 그 시기를 충분히 생활해야 하므로 미래의 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희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제3부에서는 12세에서 15세까지의 교육을 다루고 있으며, 무엇을 배우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배우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제3단계의 교육은 에밀에서 제 3부와 제 4부에 해당되는 시기의 교육이다. 12세에서 15세까지에는 신체적.감각적 발달에 기초를 두고 지적 발달을 도모하는 시기였다. 즉, 이성의 힘에 의지하여 자연과 사회.인간에 대한 유용한 지식을 학습할 수 있는 시기로 보고 지금까지의 소극적 교육에서 적극적 교육으로 전환하는 기점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어른의 지식이나 인식의 세계에 강제로 끌어들이는 일은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루소의 지적 훈련은 비교적 늦게 시작되는 반면 적절하게 때를 잡아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또 이 시기에는 지적 훈련만이 아니라 육체적 훈련 또는 육체 노동의 필요성도 함께 강조한다. 육체노동은 어른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연령에 맞는 신체 단련을 그리고 일하는 것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그 목표로 하였다.
제4부에서는 20세까지의 교육을 논하고 있다. 항상그렇듯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교육이 되어야 하며 사춘기적 정서, 도덕성 정착을 통하여 이성이 완전해 질 수 있게끔 교육되어야함을 다루고 있다. 또한 ,“우리는 두 번 태어나는 셈이다. 한 번은 생존하기 위해 태어나고, 또 한 번은 생활하기 위해서 태어난다. 즉, 한 번은 남자나 여자로서 태어나 고, 또 한 번은 인간으로서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청소년기의 특징을 지적하였다.
또한 제2의 탄생이라 표현한 대목은 "우리는 두번 태어난다. 한번은 존재하기 위해 또 한번은 생활하기 위해서 태어난다. 남녀간에는 외모에 같은 점이 있다. 같은 얼글, 같은 체격, 같은 말소리 , 모두가 같으며 여아도 아동이고 남아도 아동이다. 남자는 일반적으로 언제까지나 아이로 있도록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자연이 정해논 시간에 소년시대를 떠나며 이 위기는 극히 짧은 기간이지만 그 영향은 극히 원대하다. 폭풍우 앞에는 파도가 심하듯이 시끄러운 변화는 정욕으로써 알리어진다. 기질의 변화, 가끔 격분하는 것, 항시 焦燥하고 있는 것 등이 아이를 거의 훈련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를 유순하게 했던 소리도 들리지 않르며 지도하는 것이 눈에 차지 않고 감독을 원치 않는다.
기질의 변화를 나타내는 정신적 징조와 같이 용모에도 뚜렷한 변화가 생긴다. 그의 뺨 하부에 생기는 연한 털은 조금 검어지고 또 굳어진다. 소리는 변해서 탁해지거나 또는 안 나오게 된다. 그는 아동도 어른도 그 어느 편도 아니다. 지금까지 가만있던 눈. 그의 눈은 언어와 의미를 발견한다. 항상 맑은 시선에는 아직 신성한 순진성이 있지만 최초의 愚鈍한 표정은 이미 없다. 그는 눈을 감고 낯을 붉힐 줄 안다. 또 무엇을 느낀든 그 일에 민감하다. 만일 그의 민첩이 성급함으로 바뀌고 그의 열심이 분노로 되고, 화를 내다간 감동하게 되고, 까닭없이 울고, 그에게는 위험이 되고 있는 대상 즉 부인앞에서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고 눈이 빛나며 부인의 손이 그의 손에 닿으면 떨고 여자 앞에서 당황해지고 겁을 먹게 되거든… 유릿쓰(Chomer作이라는 Odrpsy시의 主人公)여 ! 아 현명한 유릿쓰여, 주의하라. 그렇게 노력하여 막아 두었던 주머니가 열린 것이다. 바람문이 열렸다. 순간이라도 키를 놓지 마라. 놓는다면 만사가 다 틀렸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제 2의 탄생이다. 이때부터 인간의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 이 후는 어떠한 인간의 욕정도 그가 모르는 것이 없다. 보통교육이 끝나는 이 시기야말로 정말 교육이 시작되어야 하는 시기다. 우리의 정욕은 자기보존의 중요한 수단이다. 정욕을 없애는 것은 무익하고 우스운 일이 된다. 이것은 자연을 무시하고 신이 창조한 것을 다시 고치는 셈이 된다. 그렇게 되면 신은 자신의 모순에 빠지게 되리라. 신은 결코 그런 어리석은 짓은 않는다.
정욕의 원한은 자연이다. 우리의 자연의 정욕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수단이며 자기 보존에 수용된다 .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은 다른 원천에서 온다. 자연은 우리에게 그러한 것을 부여 아니했다. 우리는 자연에 겨역하여 그것을 획득한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청년기의 교육은 루소의 가장 의도적이고 본격적이 교육론이 전개되는 시기인것 같다. 이 시기에 들어서 본격적인 지적 교육이 실시된다. 역사, 문학, 철학, 법률 등의 다양한 학과목이 교수내용이며, 뿐만 아니라 청년기에 가장 깊은 영향을 주는 사람과 종교. 사랑에 대한 교육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랑에 관한 한 대목으로 " 사람이 동포를 필요로 하면 그는 벌써 고립된 생물이 아니다. 그의 마음은 벌써 혼자가 아니다. 본능의 방향은 부정확하다. 하나의 性이 다른 타의 성을 이끄는 것은 자연의 작용이다. 선택 好惡 개인적 기호는 이성 편견 습관의 소치이다. 우리가 사랑을 할 때까지는 시간과 지식이 필요하다. 판단을 않고는 사랑을 않는다. 또 비교를 않고는 선택을 않는다. 이런 판단은 무의식적으로 성립된다. 그것은 진리다. 사랑은 항시 일정한 가치있는 성질을 가장한다. 최초에 오는 사람은 항상 가장 사랑할 사람이 되겠다. 사랑은 자연에서 생기지 않는다 뿐 아니라 그것은 자연의 욕망을 매는 줄이며 법칙이다. 하나의 성이 사랑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한 것은 사랑이다. 사람은 좋아서 고르면 그것을 갖고 싶어한다. 사랑은 상호적이며 받을려면 그만한 가치를 가져야 한다. 다른사람보다도 모든 남보다도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적어도 애인의 눈에는 그래야 한다. 그래서 처음으로 동무들을 둘러보고 그들과 비교해 본다. 거기서 경쟁 대항 질투가 생긴다. 애인의 필요에서 곧 동무의 필요가 생긴다. 사랑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유쾌한지 아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기 원하게 된다. 그런 감정에서 타인의 비판이 확고부동한 왕좌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비판의 노예가 되어 판단 위에만 자기 존재를 두는 것을 볼 수 있다."를 들수 있다.
루소의 종교관은 성선설에 입각한 것으로 전통적인 기독교의 원죄설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당시에 카톨릭교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에밀은 종교재판을 받아 유죄로 인정되어 분서처분을 받게 되고 그 저자인 루소의 체포형까지 내려졌던 것이다.
에밀은 사회인이 되어야 하므로 이 시기에 사회적 지식과 경험을 쌓는다. 사회생활을 통해 사회제도와 체제의 모순을 알게 되고 이상적인 사회의 건설에 관심을 갖게 된다. 또 도덕의 문제에도 눈을 뜬다. 도덕은 질서를 지키기 위해 또한 평화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나 그 기본은 인간의 양심이다. 루소는 양심은 신성한 본능이면 죽지 않는 것이면 하늘의 소리이므로 지적이며 자유로운 존재의 확실한 지도자로서 선과 악의 절대성에 대해 올바른 재판을 한다고 한다.
제5부에서는 성년이 되어 배우자를 어떻게 고르냐, 그리하여 성숙되고 완성된 한 인간의 표본을 제시하고 있다. 에밀과 결혼하게 될 소피라는 이름의 가상적인 여자를 위한 루소의교육론이 전개되는 부분이다. 이는 에밀의 이성에 대한 사랑과 결혼을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여자교육론이라 하겠다.
이 부분에서는 루소의 여자교육론이 나오는데 그의 여자교육론은 그의 진취적인 일반교육론과는 달리 보수적으로 표현 되고있다. 그는 여성은 남성과 종으로서의 동등한 인간이나 성이 다르기 때문에 역할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의 독립성은 인정하면서도 남녀의 상호 협력을 강조하였고 남성의 능동적인 면과 여성의 수동적인 면을 강조한 나머지 가정 중심적인 입장에서 여자 교육의 범위를 제한했던 것이다.
여자는 과학이나 물리학 또는 사변적 학문에 맞지 않다고 보고 가정생활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이 있고, 남자에 대한 내조자로서 현숙한 여자가 여성교육의 목표라고 보았다. 그의 남성중심, 가정중심, 교육이 여자교육의 기초를 이룬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여자를 남자의 소유물 혹은 노예와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에밀은 루소의 저서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일찍이 칸트는 이 책이 출판된 것은 마치 프랑스 혁명과도 같은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사실에 비견할 만하다고 극찬며 <<에밀에 심취한 나머지 매일 오후 일정한 시간이면 어김없이 거닐던 산책길에 나가는 것까지 잊었고, 따라서 그가 산책하는 것을 보고 저녁 준비를 하던 동네 부인들이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저녁 준비가 늦어졌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에밀에서 이구절이 오늘날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듯한 교육의 현실을 말하고 있는듯하다.
<br/>'당신들은 아이에게 복종의 의무를 납득시키기 위해 갖은 설득과 위협을 하며 아첨과 뇌물까지 덧붙인다. ...... 그러나 그들 연령으로는 의무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지 때문에, 그것을 진정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그러나 벌에 대한 두려움,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집요하게 추궁받는 일,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는 당혹감이 아이로 하여금 모든 것을 고백하게 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아이를 설득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이가 견딜 수 없게 되었거나 겁을 먹게 되어서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첫째 이해하지도 못하는 의무를 아이에게 강요함으로써, 아이로 하여금 당신의 압제에 대해 불쾌한 생각을 품게하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한다. 둘째,상을 받기 위해, 혹은 벌을 면하기 위해 말을 얼버무리거나 거짓말하는 것을 가르치게 된다. 마지막으로 비밀 동기를 꾸민 동기로 감추게 만들어 끊임없이 당신을 속이게 하고,자신들의 진짜성격이 당신들에게 알려지지 않게하며, 기회가 있으면 당신들이나 다른사람들을 헛된말로 구슬리는 방법을, 당신들 자신이 그들에게 가르쳐 주게된다.'
<<에밀은 인간 형성에 대한 이념 구축과 이론적 탐구를 위한 작품이다. 즉 인간은 자연상태 아래서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선량 했으나, 인간 스스로가 만든 사회제도나 문화에 의해 부자연스럽고 불행한 상태에 빠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여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루소의 교육사상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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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어딘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려기 제시된 틀속에 스스로를 맞추어 나가자고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 같다. 교육의 현실이 진학을 위한 도구로서 전락하여 교육의 참뜻은 빛을 바랜지 오래이다. 학교라는 것이 교육을 통하여 완성된 인격체를 만들어 내기 보다는 정해진 틀에 의해서 좋은 상품을 만들어 어떻게 유통시키느냐에 관심이 더욱 집중되어 있는 듯하고 그 틀이 얼마나 좋으냐에 따라 학교의 우선 순위도 정해지는 듯하다. 우리 또한 수요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틀에 가깝게 맞추어 질수록 유능한 인간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같이 틀에 짜여진 교육행태가 지배적인 오늘 - 교육의 목적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 강요하지도 않으면서 생각을 머금게 하는 책이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