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무기여 잘 있거라.]
헌 책방에서 산 책들을 보다보면 가끔 책 사이에 예쁜 책갈피라던가 곱게
말린 낙엽 같은게 끼워져 있다. 이럴 때 기분이 참 좋아진다.
(난 '정석'책이 달랑 한 권 있는데,그건 수학 문제집 용이 아니라 바로
낙엽 말리기 용으로 쓰여졌다.
여름에는 장미 꽃 잎이,가을에는 단풍이나 낙엽이...
그러니까 이 꽃 잎이나 단풍이 흐트러 질 까봐 차마 정석 책을 함부로 펼
치지 못했다.고로,내 수학 성적은 바닥이랑 매우 친하게 지냈다.)
근데 가끔 책의 첫 장에 '누구누구 에게,생일을 축하하며..'이런 류의 글
들을 볼 때가 종종 있는데 난 그들을,그러니까 책의 전 주인들을 남이 정
성들여 선물한 책을 헌책방에 팔아 치우는 매정한 인간으로 매도 했었다.
근데 그러고나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나는 선물 받은 책들을 그냥 버렸던
경험도 있고,한 술 더 떠서, 누군가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책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경험도 있다.
아무튼 이렇게 주인을 잘 못 만나 이리저리 떠도는 방랑벽 있는 책들도
있다.
하지만 오늘 소개 할 이 책은 기분 좋아지는 책도 아니고 방랑벽 있는 책
도 아닌 그야말로 팔자 더러운 책이다.
이 책을 헌책장에서 사온 후에 난,이 책을 책장 구석에 곱게 모셔 놓고
있다가,헤밍웨이-노벨상을 연상하며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까 기대를 하며
첫 장을 열었다.
근데 첫 장부터 보이는 건 전 책주인의 새카만 낙서였다.
게다가 낙서의 내용이 가관이다. 자기 딴에는 꽤나 야한 글이라고 써놓거
같은데 정말 하나도 야하지도 않고 짜증만 불러 일으키는데,이 따위의 글
을 쓰는 놈들이 대게 바지 벗겨 보면 JOT도 비엔나 소세지 만한 놈들이다
.
문학 소설에서 야하지도 않은 야설로의 추락.
책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더러운 팔자인가?
아무튼 이 비엔나 소세지놈 때문에 책의 처음 몇 페이지를 읽지 못했다.
자,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 책은 세게1차 대전시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쟁이 배경이지만 전쟁 소설은 아니다.
전쟁에서 그 흔한 영웅 한 명 나오는 일 없고,전쟁의 의미 라든가 애국심
,민족,조국 따위의 거창한 명분도 없다.
그러니깐 한일 축구전에서 우리나라가 한 골을 넣을 경우 대부분의 사람
들이 독립만세 외치며 환호 하지만,혼자서 심드렁하게 '음,축구공이 저렇
게 생긴 거였구만.'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전쟁에 대한 프레드릭이 반응이 이렇다.
그는 미국인으로 모험을 위해 이탈리아군으로 참전 했지만,나중에 그 모
험심은 사라지고 전쟁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럼 이제 연애 소설로서의 의미를 살펴보자.
난 연애 소설을 많이 읽지도 않았고,앞으로도 별로 읽을 생각도 없고,그
나마 몇 권의 연애 소설을 읽고 나서는 꼭 돈 낭비,시간 낭비를 했다는
생각에 며칠 동안은 저기압 상태가 된다.
한 마디로 연애 소설 혐오자 정도라고 생각 하면 되겠다.
하지만,이 소설은 조금 다르다.
다른 연애 소설들은 남여주인공이 서로 밀고 당기는 사랑 게임을 한다거
나 어떤 방해자나 난관이 튀어나와 주인공들이 그것을 극복가는 정렬적이
고 동적인 소설인데 반해,이 책은 주인공들의 심리가 정적이다.
남여 주인공들이 두 손 꼭 잡고 호텔에 침대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별다
른 변화가 없다.
방해자도 없고 난관도 없으며 둘의 사랑이 변하지도 않고 그들의 사랑을
열정적으로 표현 하지도 않는다.
이런 형태의 사랑 얘기가 내겐 꽤 신선하게 다가 왔지만 내가 읽어 본것
중 가장 무미건조한 연애 소설이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딱딱한 목각인형 같다.
전쟁에도,사랑에도,죽음에도, 모두 감상을 배제해 버렸다.
이것이 이 소설의 매력 일 수도,동시에 지랄 같은 점 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