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수의 아내 청산댁은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은 백화점 쇼 윈도우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구두를 살펴본다. 쪽빛이 도는 구두, 검은색 구두의 유연하게 흐르는 굽들마다에 부시게 돋은 빛, 검은 것이 아니라 유리구두를 보듯 맑은 색의 빛깔들을 손에 잡을 듯 바라보고, 희디 흰 색깔의 구두, 어느 나라 어쩌면 딸 애가 자주 보던 만화 속 주인공 페르시아 공주가 화려하게 빛나는 드레스를 입은 채 그 아래 깃단을 살짝 들어올릴 때 드러나던 구두, 쇼 윈도우 유리를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잃어버린 채 유리 위에 얹은 손바닥은 벌써 몇 개의 구두들을 보듬고 어루만진다. 그때마다 형형색색 아름다운 구두들에 미쳐 있는 눈빛에 등(燈)들이 매달린다.
그녀는 진열된 여러 켤레의 구두 가운데 굽이 높은 빨간 구두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미 나이 오십이 넘어 발뒤꿈치는 소나무껍질처럼 갈라진 지 오래고 처녀 적 가늘고 긴 발목의 유선은 이즈러질 대로 이즈러져 떡메와 다름없이 뭉툭한데, 자신의 처지를 까맣게 잊은 청산댁은 서둘러 백화점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백화점 건물의 잘 닦여진 창마다 파란 하늘자락에 점점이 수들이 놓인 구름이 가득하고 그 가운데 한 무리가 그녀의 허름한 옷자락, 그 뒷덜미를 잡아당길 듯한 형상이다. 하지만 청산댁은 뒤를 돌아볼 여지도 없이 곧장 신발 매장이 있는 삼층으로 달려간다.
잠시 후, 억지로 우겨 넣은 발, 발에 맞춘 것이 아니라 신발에 맞춘 구두를 꿰고 백화점 밖으로 나온 그녀는 이날 이때까지 한 번도 신어보지 못한 구두의 어색함 때문에 가든가든 발을 들어보기도 하고, 굽이 높아 자꾸만 발목이 접질리면서도 애써 사쁜사쁜 걸음을 옮겨 본다.
집으로 향하는 전을 타기 위해 지하 역사로 내려가면서 자신이 신고 있는 구두 쪽으로 쏠리는 이목이 하나 같이 부러움에 차 있다는 사실에 두꺼운 입술이 떨리도록 미소를 짓는다.
전철에 올라 자리에 앉은 뒤, 여러 사람의 부러움의 눈길을 받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소매 깃을 늘여 구두의 앞 코를 문질러 본다.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또 그 건너에 앉은 사람, 그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어색한 미소를 오히려 부러움으로 여기는 청산댁은 오늘 사 분에 넘치는 돈을 들이긴 했지만 내심 잘 사 신은 구두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사뭇 떨리는 가슴을 느끼고 즐긴다.
\"미숙 애미야! 저녁이 다 됐는데 아직까지 처 자고. 밥은 원제 줄라고 그랴?\"
\"밥이라니? 어머니는 내가 시장에 갔다 오겠다고 한 말을 잊어버렸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지금 전철을 타고 있는데.....\"
꿈과 현실 사이, 그 몽롱한 상태의 어느 곳에서 들려 오는 시어머니의 지긋시런 밥타령에 청산댁은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진다.
\"낮잠은 잠자리가 오간 줄 모르게 설핏 자다가 일어나는 게 낮잠이지 점심 채려준 지 원제여? 그예 저녁나절까지 잠을 자 그래. 남편은 한 푼이래두 벌겠다구 나이 오십 줄 육십 줄이 가까운 사람이 일하러 나갔는데 그렇게 잠만 퍼져 자니 들어오던 복두 나가지 원!\"
청산댁은 시어머니의 혀 차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제서야 자신이 꿈을 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경대 앞에 앉아 부시시한 머리를 추스리는 동안 조금 전까지 자신이 신고 있던 빨간 구두의 압박감을 잊지 못하고 몇 번이나 발을 내려다본다.
\"핵교에 간 미숙이두 올 때가 됐어. 어여 서둘러 밥 준비를 하라니까 뭘 그래 꾸물거리구 있어?\"
\"어머니! 어머니는 점심을 장정밥으로 먹구서두 벌써 배고프다구 난리예요? 없는 집구석에서 끼니 밥은 꼭꼭 챙길려고 기를 쓰니, 쌀은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져? 애 아빠는 석 달이나 펑펑 놀다가 일 나간 지 일 주일밖에 되지 않았다구요. 월급도 못 받은 처진데 어른이 돼가지구 당장 배고프다고 밥타령을 일 삼으니.\"
속이 상한 청산댁은 늘어진 머리를 홀쳐 묶자마자 문을 박찬다. 문을 열자 다닥다닥 붙은 다세대 주택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남편이 직장을 잃은 뒤부터 출입문을 열 때마다 억장을 가로막는 집에 집들이었다. 구차스런 살림살이는 왜 그리 많이 눈에 들어오는 지 먼지 낀 집들 여기 저기에 빨강 파랑 노랑 원색의 프라스틱 함지박에 애들 자전거에 몇 달 째 치우지 않은 폐가구들. 볼썽사나운 것들도 그렇거니와 세대마다 연결된 전화선과 전깃줄들의 검은 그물들은 정말이지 꿈에서도 가슴을 옭아맨다.
\"이런 데서 살면서 복이 굴러 들어오면 얼마나 굴러 들어올까. 하루 아침에 금 천쭝이라두 떨어진단 말이야?\"
청산댁은 허리 아래로 늘어진 파자마를 끌어올리면서 중얼거린다.
\"형제가 넷이나 되는데 요즘 세상에 장남이 꼭 어머니를 모셔야만 된다는 법도 없는 세상에 더군다나 애 아빠 실업자 된 걸 모르지 않는 작은 집 이들이 저렇게 짐짝 떠밀 듯 맡겨 놓고, 내 이것 저것 생각하자면 잠이나 퍼져 자는 것이 속이 편치. 그렇다고 허구헌 날 자는 낮잠도 아닌데 핀잔이 저리 심하니. 노인네 으....... 노인네!\"
청산댁은 방으로 들어가지도 그렇다고 앞을 바라보자니 꽉꽉 막힌 하늘 바라보기도 싫어 오도 가도 못하고 맨 그 자리를 서성거린다. 아니 서성거리는 것이 아니라 절름거리고 있는 그녀다.
\"그나저나 신발 꿈이 꿈 중에서는 제일 좋지 않다는데 또 뭔 일이 있으려나!\"
현실적으로나 또 마음으로나 고통은 한꺼번에 찾아든다는 사실, 특히 이 고통이란 천하의 나쁜 인자는 힘들고 어둡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갑자기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찾아든다는 것을 몸소 경험으로 알고 있는 청산댁은 낮잠을 자면서 꾸었던 꿈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꿈 속에서나마 그 빛나는 구두를 신었던 기억보다 꿈을 깨고 나서 저며드는 불안감 더 크게 느껴진다.
\"얘 에미야! 밖에서 뭘 하는 겨? 전화 왔잖어! 그 놈의 벨소리 귀청이 다 떨어지것네! 아, 어여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