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랑살랑 봄바람이 내 귓가를 간지럽히던 어느 봄 날.
날씨는 얄밉게도 너무 화창했고.
바람마저 따스해서 화가 날 정도였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구름이라도 잔뜩 끼어줬으면 좋았으련만.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던 날.
난 이별했다.
안녕. 내 첫 사랑.
그리고,
후끈거리는 여름 바람이 또 한 번 나를 화나게 할 때,
뜨겁고 또 뜨거운 바람으로 밤잠을 못 이루게 할 때,
사랑이 찾아왔다.
사실,
사랑이라 하기 어려웠다.
아직 이렇다할만한 일도 없었거니와,
감정에 대한 확신같은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단계.
그쯤이라고 해두면 좋을 것 같다.
A는 이따금씩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게는 1분에서, 길게는 1시간을 넘게 통화했다.
세상 모든 연인들의 통화가 대부분 그러하겠지만,
이 통화속에서 그다지 중요한 내용이란 없다.
그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오늘 내가 겪었던 일, 보고 듣고 느꼈던 일.
그리고 서로 교감하기 위해 일부러 내뱉는 말들.
그게 전부였다.
A와 나의 통화라고 해서 별다를 건 없었다.
얼마 전 본 영화 이야기에서부터,
친구 이야기, 술 이야기.
아니, 어쩌면 나는 A와,
지극히 친구와의 통화에서도 할 수 있는,
정말이지 시덥지도 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도 몰랐다.
보고싶어서 전화를 걸었다느니,
작업을 걸겠다느니 하는 말 같은 건,
신경쓰지 않은 지 오래였다.
워낙 그런 장난을 거는 사람들은 주변에 많았다.
진심인지 장난인지 모르게,
겁쟁이들과 같은 남자들이,
한 번씩 그런 말들을 툭툭 던져대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말은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진심을 확실하게 드러내보이기 전까지는.
오늘도 A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한 10분쯤 통화 뒤에 다른 곳에서 전화가 걸려왔다며 이만 끊자고 했다.
그리곤 잘 다녀오라는 말을 건넸다.
딱히 휴가라고 해서 어딘가를 가야한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휴가란 말 그대로 쉬기 위한 거니까,
3일이란 짧고도 긴 시간을 집에서 보내도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다.
하루를 집에서 길고 긴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문득 어디론가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에서 가 볼만한 곳을 한참을 뒤적거리다가,
무작정 짐을 싸들고 집을 나섰다.
날씨는 썩 좋지 않았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뭔가 어중간한 날씨였다.
어디로 떠날까.
어디로 가 볼까.
목적지는 풍력발전소였다.
문득 오늘 아침,
첫 사랑과 헤어졌던 날을 떠올렸기때문이기도 하고,
새삼스럽게 뭔가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이 가슴에 불어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이건 다 핑계일까.
횡계행 버스표를 끊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왜 문득 바람을 느끼고 싶었는지.
정말 그 두 사람 때문이기만 했을까.
아침에 A에게서 연락이 온 이후로 몇 시간이나 지났지만,
A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A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루에 10번씩 전화를 하다가도,
또 어떤 날은 문자 한 통 없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바쁜 일이 있겠거니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차 의심으로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변덕스러운 사람인가?
아니면 날 지금 시험해보는건가?
그렇게 잠을 자고도 피곤했던 모양인지 이내 구부정한 자세로 잠에 들었다.
한 시간쯤 잤을까.
차창 밖에는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을 들고 나오기는 했지만,
쉬이 그칠 비가 아닌 것 같아 걱정이 됐다.
걱정 반 두려움 반으로 멍하니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때 아닌 폭우라니.
장마철이 지나간 지가 언젠데.
이 놈의 비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때를 모르고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달리는 버스 안.
창밖의 빗물이 일제히 한 곳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난자를 향해 도전하는 수 억 개의 정자들 같았다.
수 억 개의 정자들 중 오직 하나에게만 주어지는 기회라니.
안타까워 해야할까.
놀라워 해야할까.
횡계터미널에 내려 택시를 잡아탔다.
"어서오세요."
"네."
"어디로 가십니까?"
"풍력발전기 보러 가는데요."
"풍력발전소요? 비가 아직 많이 오는데, 괜찮으신가요?"
"네, 우산 가져왔어요."
"네. 알겠습니다."
택시 기사는 후덕해보이는 인상을 가진 중년의 남자였다.
손님들과의 대화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간간히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그런데 여자 분 혼자서 풍력발전기는 왜 보러 가십니까?"
"그냥요. 갑자기 바람이 보고 싶어서요."
"바람이라.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눈으로 보고 싶으신거군요."
"그런가요?"
"바람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죠. 그래서 어쩌면 믿을 수도 없구요.
그치만 풍력발전소에 가서 힘차게 돌고 있는 발전기들을 보면,
아, 이게 바람이구나. 바람이 여기서 이렇게 불고 또 저렇게 부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되죠.
사랑도 마찬가지구요. 안 그렇습니까? 허허."
"네, 그렇네요."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과 사랑이라.
바람은 풍력발전소에서 보고 믿게 된다지만,
그렇다면, 사랑은 어디서 무엇을 보고 믿어야 할까.
도대체 어디에 있는걸까.
"다 왔습니다."
"네, 여기 돈. 감사합니다."
"네, 좀 잦아들긴 했지만 아직 그래도 비가 많이 오니까 조심히 올라가십쇼."
"수고하세요."
택시기사 말처럼 비는 아까보다 잦아들긴 했지만,
그래도 우산을 쓰면 우산 위에 투덕투덕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도대체 무엇을 보려고 여기까지 왔을까.
언젠가,
첫 사랑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신을 사랑한 손으로, 입술로, 마음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왜 그런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겁도 없이 했을까.
그 관계가 평생 가지 못할 거란 건, 분명 알았을텐데.
그 때, 이별은 생각해보지도 않았지만,
평생 갈 만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 쯤은 알았을텐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풍력발전소로 향하는 길은 1시간쯤 걸렸다.
걷는 데 약한 나로써는,
그냥 아까 택시 기사분께 끝까지 올라가달라고 부탁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
바람이었다.
바람.
이유없이 눈으로 보고 만지고 느끼고 싶었던 바람.
멀리서 볼 땐 그저 작은 바람개비 같던 것이,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커지고 커지고 또 커졌다.
내 팔 한가득 안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러기는 커녕 나와 같은 사람이 여럿 서야만 그 둘레를 다 끌어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꼭대기를 올려다보니,
성난 하늘이 아직 잔뜩 먹구름을 품고 있었고,
비는 잠시 그치는 듯 했다.
목이 아프도록 끝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괜시리 눈물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온전히 그 사람을 떨쳐내려고 여길 찾아왔나.
잊어내겠노라고 씻어내겠노라고,
벌써 2년을 넘게 그렇게 발버둥치다가.
문득 바람이 보고 싶다는 거짓말로 내 마음을 감싸고,
여기까지 이렇게 달려왔나.
아니,
아니면 새롭게 시작될 A의 마음을.
아직 확실치 않아서 나조차 혼란스러운 마음을,
그저 평범한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바람을,
이렇게 나마 직접보고.
그저 평범한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사랑을,
이렇게 나마 직접보고.
A의 마음을 확인받고,
내 마음을 인정하려고 왔나.
아직 아무 것도 정해져있지 않은 관계에서,
무얼 바라고 또 무얼 원해서.
이제 그만.
과거란 과거는 모조리 씻어내고,
현재, 그리고 미래를 향해 웃어보여도 되는걸까.
당당하게 바람에 맞서봐도 되는걸까.
"여보세요."
"어디야?"
A의 전화였다.
얼마만에 쓰는 소설인지 모르겠네요.
그냥 문득 바람, 바람이라는 단어만 생각이 났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일까요.
그게 바람이든, 사랑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