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됨은 없다. [서정윤님의 시를 읽고]
가끔은, 그래. 가끔은 멀리서 바라보자.
그것은 하나됨이란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우리가 하나되지 못하는 이유를 발견하곤 한다.
사랑도 우정도 연대도 교감도 하나됨을 보여주진 못한다.
단지 난, "하나됨"이라는 환상만을 접하며, 그것을 현실이라 느끼진않는다.
어떤 것도 하나됨이란 없다. 그것을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하든, 선과 악처럼 이분법적 사고라고 말하든, 도가에서의 "道"라고 말하든, 그것이 중도라는 의미이든, 변증법이든....지간에, 둘을 극복하는 하나됨이란 없다. 그것은 망상이며 환상이다.
하기에, 그 얼마나 중요한 것이 사랑하는 마음이요, 우정을 나누는 것인가.
둘 사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극복의 도구로서 사랑과 우정을 나눈다면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난, 하나되기를 희망하기에 사랑하고 우정을 나누지는 않는다.
우린 언제까지나 하나가 아닌 둘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사랑과 우정의 기획이다. 하나가 되기 위한 망상보다는, 진정으로 우리는 "둘, 너와 나, 인간과 인간"사이의 만남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나와 다른 그 사람을 인정하고 그 사람의 가치를 그 사람의 것으로 되돌리고, 그 찌꺼기들의 결정체들인 교감, 하나되는 듯한 느낌, 연대감 등을 아무런 다른 뜻이 그것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하나됨"이라는 것이 그 얼마나 추상적이며 관념적인가.
그것으로부터 출발한 철학은 이미 거부되고 있다.
서구의 이성주의, 합리주의는 또 다른 하나됨을 위한 철학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너와 나 사이의 극복될 수 없는 것 까지 극복할 수 있다는 오만함으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민족주의를 잉태하였으며, 나찌즘까지 토해냈으니, 그 얼마나 폭력적인 생각인가.
난, 적어도 이것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나됨"을 난 인정하지 않으며, 나의 출발점은 너와 나 사이의 극복될 수 없는 레떼의 강을 인정하는 것이며, 너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이며, 비로소 내가 나 자신을 극복하는 출발점으로 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