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궁성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왕자님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자님이 이름 모를 아가씨를 찾아 남몰래 여행을 떠났다고 수군거렸어요. 소녀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땐, 이미 왕자가 자취를 감추고 난 뒤였지요.
왕자가 없는 궁성을 지키는 건 소녀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요.
한동안 소녀는 왕자님이 없는 궁성을 배회하며 그가 오기를 기다렸대요..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왕자님은 돌아오지 않았대요..
소녀는 왕자님을 남몰래 지켜보며 가슴앓이를 했던 시간들이 차라리 그리웠다고 하더군요..
기다림. 기약도 없는..기다림은 소녀에겐 견딜 수 없는 시간의 형벌과 같았다고 했지요...
기다림에 지쳐가던 소녀는 왕자님을 찾을 결심을 했습니다. 그 옛날 어둠의 궁성으로부터 왕자를 찾아 넘어온, 12개의 산과 12개의 바다를 다시 되건너서 전보다 힘겨운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어요..
"혹시..빛의 왕자님을 보셨나요? 미소가 아름다운 빛의 왕자님을 보셨나요?"
소녀는 지나는 마을마다 왕자를 보지 못했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봤대요.
사람들은 소녀가 물을 때마다 고개를 저으며,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노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답니다.
"곱고 선량한 눈빛을 한 빛의 왕자님을 찾고 있어요. 그 분은 어떤 여인을 찾아다니고 있지요. 안개와 같은 여인이라고 했어요.. 혹시 그런 분을 보지 못 하셨나요? 미소가 아름다운 분이세요. 그 분을 보셨나요?"
소녀는 애가 타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 보았지요.
그런 소녀에게 한 노파가 다가와 조용히 말을 해 주었답니다.
"난, 봤다우. 안개 여인을 찾아 헤맨다는 그 남자를 봤어...그가 곱고 선량한 눈빛을 하고 있었는지 어쨌는지 몰라도.. 그가 빛의 왕자인지 어쨌는지 몰라도...그의 미소가 아름다웠는지
어쨌는지 몰라도.... 그가 안개 여인을 찾아 헤맨다는 것은 확실하게 들었다우. 그는 말이야.
몹시도 궁색한 차림으로 아주 많이 지쳐 보였다우.. 눈가엔 깊은 슬픔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지...그는 뭔가를 갈망하는 듯한 시선으로 저 길을 따라 걸어 갔다우..아마 그 사람이 아가씨
가 찾는 왕자님일 게야.."
소녀는 노파가 가리키는 길을 보았지요. 그 곳은 '절망의 나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바라보는 소녀는 몹시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왕자님은 세상을 헤매다 '절망의 나라'까지 흘러들게 되셨군요...왜..절망의 나라까지 오게 되었던 건가요...안돼요..안돼요...'절망의 나라' 는 안돼요..'
소녀의 눈엔 투명한 눈물이 가물거리고 있었습니다.
노파는 그런 소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지요.
"행여 그곳에 갈 생각은 하지 말우.. '절망의 나라'에 갔다가 빠져 나왔다는 사람들 얘긴 듣지도 못했다우. 아가씨에게 말못할 사정이 있는 듯 보이지만..그래도 절대 '절망의 나라'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은 하지도 말우.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곳이란 말이유. 절망은 결국엔 아가씨를 병들게 하고 말거유."
노파는 소녀의 양볼을 적시고 있는 눈물을 주름진 손등으로 닦아주며 말했지요...
" '절망의 나라'는 두렵지 않아요. 지금의 제 심정보다 더한 절망은 없기 때문이에요.. 그 분이 나의 희망이고 절망이랍니다. 이미 난 절망을 맛 본 사람...난 이미 그분으로 인해 깊은
병이 들어 있는 걸요...그는 나의 희망이자, 나의 절망. 이보다 더한 절망은 있을 수 없답니다..난 두렵지 않아요. 그를 볼 수 없다는 절망보다 더한 절망이란 내겐 있을 수 없으니까요.."
소녀는 애처로움이 그윽한 모습으로 노파의 두 손을 꼬옥 쥐었습니다.
"전, 가야해요. 나의 왕자님이 그곳에 있어요. 그 어떤 절망이라 해도 왕자님을 향한 제 마음을 접게 할 수는 없어요. 전..왕자님을 뵈어야 해요. 왕자님이 그곳에 있어요. 그러니 난 가야해요..왕자님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어요.."
"절망이 깊어지면 곧 어둠에 빠지게 된 다오..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의 늪에 빠져 허무와 체념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난 많이 보아 왔어..그러니 가지 말우..아가씨의 왕자도 이미 깊은 절망 속에 폐인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르는데..그런 사람을 찾아서 뭐하려고 그러우. 아가씨는 아직 젊어요..체념과 허무를 알기엔 너무 젊단 말이우.. 가지 말아요."
"난 이미 한번 어둠에 있어봐서 알아요.. 어둠에 면역이 된 저는 또다시 절망이 찾아와도 견딜 수 있지만, 왕자님은 달라요. 자신의 그림자마저도 외면할 정도로 어둠을 두려워하는 분이세요. 왕자님, 자신은 오직 앞만 보며 간다고 했지만, 난 알아요..실은 왕자님이 칠흑 같은 어둠을 두려워하신다는 것을요. 어두운 것에 대한 두려움은, 몰아내고 싸워 걷어내야 할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게 했던 것이죠. 왕자님이 보는 세상이라는 것은 언제나 밝고 기분 좋은 빛의 모습으로만 존재해요. 그는 밝은 빛을 사랑하시는 분이니까요. 그 빛에 조금이라도 그늘이 지는 걸 용납치 않으시는 분이란 말이에요..그렇게 맑고 깨끗한 분이..절망에 발을 들여놓았어요..그분은..또다른 세상의 모습에 몹시 상심하고 계실지도 몰라요..알게 하고 싶지 않아요..그 밑바닥까지 알게 하고 싶지 않아요...모르셨으면 좋겠어요..그분이 모르셨으면 좋겠어요..그러니.....제가 도와 줘야 해요..절망 속에서 헤매고 있는 왕자님을 돌아오게 해야 한다구요..그 옛날 빛의 왕자님이 깊은 어둠으로부터 저를 구해주었듯이..이젠 제가 왕자님을 구해 드려야 해요..빛나던 왕자님이 절망에 빠져든 걸 안 이상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는 걸요... 왕자님의 모습을 뵙기 위해 이곳까지 왔어요.. 여기서 되돌아 갈 수는 없어요. 왕자님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