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갈수록, 소녀는 왕자님을 그리워하였습니다.
왕자님이 보고 싶었대요..자꾸만 왕자님의 모습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대요.
힘들어하고 있을 왕자님을 생각하자니 가슴이 죄여와 미칠 것만 같았대요...
아~ 그래요. 역시나 소녀는 왕자님을 떨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요..소녀는 왕자님이 어떠한 모습으로 있던지 간에 왕자님이기 때문에 좋아했던 것이었습니다. 소녀에겐 오직 빛의 왕자님이 전부였으니까요..
12개의 산과 12개의 바다를 넘어올 때부터, 이미 왕자님은 그녀의 마음을 전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죠........
소녀는 비가 몹시 오고 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침상에서 끙끙 앓고 있는 왕자를 찾아갔습니다. 아파하고 있는 왕자님의 모습을 보자 눈물부터 왈칵 쏟아지더랍니다.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난 뒤 소녀는 왕자에게 말했대요.
"왕자님! 마음을 전하세요! 괴로워하지 말고 그녀에게 마음을 전하세요."
앙상하게 메마른 왕자님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제서야 소녀의 존재를 감지했지요.
"소녀여.. 네가 왔구나..."
"빛의 왕자님이 왜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겁니까? 사랑한다면 고백하세요!! 아파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말씀을 하세요!! 그래서 함께 하는 사랑을 이루세요!! 이렇게 홀로 고통스러워하지 말아요..네?.. 그렇게 하세요."
"....물론, 나도 그녀에게 내 맘을 전하고 싶단다.. 아주 간절히."
"그렇게 왕자님 마음이 간절하다면..주저할 이유가 없잖아요..."
"하지만 그럴 수 없다..난 그녀에게 ..고백을 할 수가 없어. 소녀여, 안개 속을 헤매는 지금의 내 모습을 보렴..난 이미 예전의 빛나던 왕자가 아니니라. 이런 모습으로는 그녀에게 말 한
마디 건낼수 없어..그리고, 무엇보다...나의 고백으로 놀랄 그녀를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구나.."
"안개가 걷히고 나면, 그녀의 존재를 좀더 확실하게 볼 수 있잖아요. 왕자님, 그녀에 대한 사랑을 가슴 안에 담아 두지 마세요..그녀가 알게 하세요. 왕자님, 그만 아파하시고 말씀하세
요..네? 왕자님의 모습 그대로..왕자님의 마음을..그녀에게 보여 주세요.. "
"그녀는 내 고백과 함께 멀리 달아나고 말 거야..그러면, 난 그녀를 볼 수 없게 된단 말이다.
난, 그게 두렵구나. 나의 고백으로..또 나의 존재로 안개처럼 흩어져 버릴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게 정말이지 두렵기만 하구나.."
소녀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그 자리에 털벅 주저앉고 말았대요..
신비의 여인에게로 향하는 왕자님의 애틋한 사랑이.. 소녀의 가슴에 지울 길 없는 상처가 되었기 때문이였지요...
소녀는.. 오로지, 그녀만을 생각하는 왕자님의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에 헤어날길 없는 절망감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홀로 사랑을 키우며 아파하는 왕자를 소녀가 어떤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두 눈 가득 괴로움을 담고, 차마 소리내어 울지도 못한 채 눈물을 삼키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그는 보지 못했지요...행여나 자신의 울음소리에 왕자님이 걱정할까 입술을 꾸-욱 깨물며 부루루 떨고있는 소녀의 모습을 그는 알 수 없었지요...
슬픔이 짙게 배인 시선에 애타게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소녀의 모습을... 왕자님은 진정, 알지 못했습니다...
소녀는..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의연한 어조로 왕자님에게 말했대요.
"왕자님, 그녀의 모습이 어떤지.. 제게 말씀해 주세요.. 왕자님이 못하시겠다면, 제가 할게요..
저라면, 그녀가 도망치지는 않을 거예요. 아니, 제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할게요. 그러니 그녀의 모습이 어떠한지 말씀해 주세요.. 제가 그녀를 알아 볼 수 있게 말씀해 주세요. 이렇게..
왕자님의 사랑을 계속 마음에 쌓아두면, 큰일이 나고 말 거예요.. 후회하고 말 거라구요..평생을 그리움 속에서 살고 싶으세요? 기다림 속에서 살고 싶으세요?"
왕자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왕자님은 앙상한 뼈가죽만 남은 손으로 발갛게 물들어 버린, 두 눈두덩이를 비벼댔습니다. 그렇게 몇 차례 반복 하다가 안 되겠던지, 아예 얼굴 전체를 문질러댔습니다.
"소녀여.. 소용없다.. 너에게 알려 줄 수 없다....나도 모른다..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차림으로 있었는지...기억할 수가 없구나... 아무 것도 ..기억 할 수 없단 말이다..다 부질 없는 짓이다...하아...난 그녀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없어..."
왕자님은 몹시 고통스러운 듯, 온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오! 왕자님..너무 괴로워 마세요..기억나지 않으시면...오늘 무도회에 나가셔서 그 분의 모습을 보고 말씀 해주시면 되잖아요. 그분이 어떻게 생기셨고, 어떤 옷을 입었으며, 어느 자리에 계신지...보고 말씀해 주시면 되잖아요."
왕자님은 양미간을 잔뜩 찡그리곤, 한동안 소녀를 바라보았대요..
왕자님의 두 눈두덩이가 어느새 다시 발갛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소녀는 그의 고운 눈에 맑은 눈물방울이 어려있는 것 같았다고도 했지요..
"소녀여, 이제 더 이상 그 아가씨를 볼 수 없단다.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어느 때부터인가 무도회에는 나오지 않더구나...무도회에 나가도 볼 수 없단 말이다...그녀가 없는 무도회는 이젠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구나...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그녀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에, 줄곧 가슴이 아팠느니라..아느냐? 내가 이렇게 몸져누운 것도 그녀를 보지 못해서 생긴 것임을... 소녀여....알겠느냐?"
또로록-또로록-또로록- 구슬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왕자님의 볼을 타고 흘렀습니다.
결국, 왕자님은 슬픔을 참지 못해 맑디맑은 눈물을 흘렸던 것이죠...
해맑은 미소를 짓던 왕자님의 눈에서 수정 같은 눈물이 또로록 떨어질 때마다, 소녀의 가슴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대요...
'울지 말아요..울지 말아요..왕자님....제 마음이 아파요...당신이 눈물짓는 모습을 보는 제 마음이..너무나 아프단 말이에요..제발..제발...그녀 때문에...눈물을 흘리지 말아요.....'
"왕자님.. 마음이 아픈가요?"
왕자님은 황급히 눈물을 훔치시며 말했습니다.
"..아니다..."
"...왕자님..눈물이..흐르고 있어요..어디가 아픈 건가요?"
"흠..흠...그래..그렇구나...흠..눈물이...흐르고 있었구나...흠..흠..그러나....마음이.... 아픈 건 아니다...
그래, 그냥 눈이 시리구나. 아주, 많이..눈물이 흐르는 건....그래, 눈물로 씻어버리고 있는 중이었어...그런 거야.. 언젠가 네가 그랬지? 눈이 시릴 땐 눈물로 씻는 거라구... 이런...이런..자꾸.. 눈이... 시리구나..눈이.. 시리구나....."
왕자님의 맑고 고운 눈에선 쉴새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