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님은 소녀가 하고 있는 사랑과 꼭 같은 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가씨에 대한 존재를 소녀가 모르고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지요.
왜냐하면 왕자님 자신도 신비의 아가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왕자님은 그녀가 안개 같다고만 했지요.. 잡히지 않으며 존재를 알 수 없는 묘한 매력을 풍기는 아가씨라고... 그래서 왕자님 자신도 그 여인에게 말 한번 붙여보지 못했다고 했지요.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와서 고요히 자리를 지키다 돌아가는 아가씨의 희미한 모습을 지켜보는 게 전부라고 했지요.
마치 소녀가 장막 뒤에서 왕자님의 빛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처럼요...
"모두들 내 관심을 얻기 위해 치장을 하고 웃음을 흩뿌리지. 하지만 그 아가씨는 달라. 그냥 고요히 무도회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는 거야. 그녀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든 말든.. 오로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거든. 그녀를 보게 된 건 아주 우연이었지.
내 심장이 그녀로 인해 이렇게 뛰게 될 줄...정말 몰랐었다.."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그녀에 대한 마음을 소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왕자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방법이라고 했어요.
"소녀여, 난 도저히 그녀에게 다가갈 수가 없구나. 내가 다가서면 그녀는 안개처럼 흩어져 버리거든..그녀는 내가 그녀의 존재를 알 수 없게, 언제나 안개의 장막을 치고 있지. 하지만 난 다 느끼고 있어. 그녀의 존재감을... 그녀가 알지 못하도록 내가 행동하고 있을 뿐이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그녀의 존재를 느낀단 말이야..
그녀의 눈을 보았느냐? 아니지..넌 모를 테지.. 그녀의 눈은 열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단다. 나도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느니라. 그녀의 눈을 보았던 그때,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화들짝 놀라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숨어 버리고 말았지...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땐 내 가슴이 다 얼어붙는 줄 알았단다. 그녀가 내게서 멀어지는 걸 견딜 수 없었어. 다행히도 다음날, 그녀가 다시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었지. 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녀의 고요한 침묵에 파문을 일으키는 짓 따윈 생각조차 할 수가 없게 되었어. 그녀는 안개와 같은 사람, 내가 그녀에게 다가서면 흩어지는 안개와 같은 사람이기에.."
"네..그렇군요..그 분은 자신을 드러내는 걸 원치 않는군요.."
"그녀가 웃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단다. 오!! 귀엽고 달콤한 웃음소리..내 가슴은 환희로 가득 채워졌었지. 그녀가 웃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거든. 하지만..
어떤 날은 깊은 한숨소리를 듣기도 했지..그녀의 한숨소리가 어찌나 내 심장을 파고들던지, 그 순간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내 품안에 꼭 안아 주고 싶더라니까. 그녀가 한숨을 쉬지 못하도록 내 가슴 안에 꼭 품어주고 싶은걸 간신히 참았단 말이다..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지. 그녀가 나의 출현으로 놀랄 건 자명한 사실이니까.. 그녀는 말이 없는 사람이야. 웃음소리와 한숨소리만이 내가 들은 전부거든.. 그녀가 말하는 소리를 한번도 듣지 못했지. 그래서 요즘은 춤도 추지 않고, 한 귀퉁이에 서서 그녀의 소리를 듣지 않을까 귀기울이곤 한단다..그녀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무심하게 고요한 침묵 속에 무도회장을 내려다보기만 한단다..."
"네..그렇군요. 그분은 웃기도 하고, 또 한숨 짓기도 하는군요.."
"저런..소녀여, 눈이 또 시린가 보구나. 어서 눈물로 씻어 내려무나.."
소녀는 눈 안에 차 오르는 눈물을 훔치면서도 미소짓는 걸 잊지 않았대요.. 왕자님이 걱정하는 걸 원치 않았거든요. 착한 왕자님이 슬퍼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가슴 아파할까 봐...애써 미소 지었지요.. 눈물은 흐르는데.. 웃으려니 얼마나 힘겨웠겠습니까....
왕자님은 알 수가 없었죠.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소녀가 슬픈 모습으로 눈이 시리다는 핑계를 대며 눈물을 닦아내는 이유를......
정녕 알 수가 없었습니다.
소녀는 가끔씩 애절한 눈빛으로 왕자님을 바라보았대요.
'제 눈 속에 담긴 언어를 읽어 주세요.. 제 맘이 전부 나타나 있는, 저의 눈을.. 한번만이라도 봐 주세요..왕자님. 제가 보이지 않나요?? 언제나 왕자님만을 생각하는 제가 보이지 않나요?'
그 옛날 어둠의 궁성으로부터 구해준 소녀가 바로 자신임을 왕자님이 알아봐 주기를 기원했어요... 왕자님으로 인해 빛의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알아봐 주기를 기원했지요..
그리고...왕자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험난한 여행을 감행하여 이곳까지 오게 된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알아봐 주기를 기원했어요.
그렇게 소녀는 눈빛 속에 많은 기원의 언어를 담고 왕자님을 간절히 바라보았답니다.
그러나 왕자님은 소녀의 간절한 마음에도 아랑곳없이, 그 순간에도 신비의 아가씨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떠가는 구름만을 쳐다보곤 했대요..
왕자님은 지금까지 한번도 소녀의 진심을 들여다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상냥하고 가엾은 거위지기 소녀라고만 생각하며 지내왔던 거지요.
뒤돌아보지 않는 빛의 왕자님에게 뒤돌아 봐주길 기다리는 소녀의 바램이 전해질 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소녀의 마음은 좀처럼 왕자님의 마음으로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왕자님은 어느 순간부터 깊은 한숨을 짓는 버릇이 생겼대요.
몹시도 음울하고 낙심한 모습을 하고서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시름에 잠기기도 했지요.. 가슴속에 넘쳐나는 열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런 왕자님을 지켜보던 소녀는 드러내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 왕자님이 너무나 슬퍼 보였대요.
소녀는... 알잖아요. 혼자 하는 사랑이 어떤 건지, 전하지 못하는 마음이 어떤 건지, 너무 잘 알고 있잖아요...그래서 왕자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었던 거지요.. 비록 자신의 가슴은 갈갈이 찢기는 고통을 느낄지라도...말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