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잔비가 그치고 시원한 바람이 살랑거린다.
하늘은 봄볕을 닮아있다.
이런 날 찍는 사진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잠시 작은 틀 안에 갇혀 있는 듯 살아있음이 느껴진다.
난 습관처럼 두 손으로 네모난 틀을 만들어 한 쪽 눈에 갖다대어 보았다.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면 그것들은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특별하게 내 눈 안에 박히곤 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냥 지나치던 초라한 구멍가게의 간판도, 파리를 쫓는 할아버지의 인상쓴 얼굴도
네모난 틀 안에서 그들은 더 이상 일상적인 것으로 남지 않는다.
새롭게 생동하는 것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끝없는 목마름 속에 한 모금의 생수와도 같은 의미였다.
나의 어깨를 짓누르던 고등학생이라는 벗을 수 없는 멍에...
그 속에서도 내가 숨쉴 수 있었던 것은 사진이라는 유일한 탈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의 한 토막을 정지시킨 채 가들 수 있다는 것은 마술과도 같은 설렘이다.
나는 그런 사진의 마술을 사랑한다.
새벽아침 짙은 안개 속을 헤매 이는 것처럼 '기억'이란 놈은 아른거리는 '추억'만을 만들뿐이다.
그리고 그 추억이란 놈은 목메이는 보고픔으로 그리움으로 가끔씩 하루를 온통 어지럽혀 놓기도 한다.
그런 구질거리는 기분이나를 곁눈질 할 때마다 나는 잡히는 추억을 열어낸다.
한참을 잊었다 바라보아도 선명하게 내 눈 속을 가득 채우는 추억을 만져본다.
사진의 그런 신비로운 마력은 그것을 내 삶속에서 영원히 포기할 수 없게 하는 이유로 충분하였다.
민서에게도 그것은 특별함이었다.
하지만 고3때부터 사진을 멀리했던 민서는 가끔씩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고3 내내 먼지에 덮여가던 사진기처럼 내가 가졌던 열정도 그 많았던 꿈들도
그것과 함께 낡고 초라하게 녹슬어 버린 거라고...
한숨을 토해내듯 그렇게 얘기할 때면 그의 눈 속 가득 쓸쓸함이 묻어있었다.
그렇게 민서는 자신에게서 그것을 잠시 떼어두었다.
그렇지만 늘 나와 동행하던 촬영여행만은 여전히 함께 해 주었다.
그것이 난 참으로 고마웠다.
이미 그와의 여행은 내게 있어 오래된 습관처럼 굳혀져있었기 때문에
혼자 나설 여행을 생각할 때마다 내심 염려가 되곤 했었던 터였다.
그가 사라지기 얼마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