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실수로 사랑하는 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게이조는 그 아내에 대한 복수로 살인범의 딸을 키우게 하는 무서운 남자이다.
물론 아내의 부정으로 세 살 박이 어린 딸을 잃어야하는 슬픔을 견딜 수 있는 남자는 없으리라.
자신을 저버린 아내에 대한 불신과 배신감으로 무서운 일을 꾸미게 된 게이조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나, '과연 꼭 그래야만 했을까'란 의문을 던져보게 된다. 정녕 꼭 그래야만 했을까?
인간의 복수심과 증오는 얼마나 깊어야만 그렇게 잔인할 수 있는 것일까?
딸을 살해한 범인의 딸을 아내에게 키우게 할만큼 게이조의 증오는 컸던 것일까?
후에 자신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벌어지게 될 비극을 생각해 보지는 않았던 걸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모든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살인자의 딸을 데려와 키우게 한 건 그의 불타는 복수심이 지극히 강했기 때문이리라.
후일 벌어지게 될 비극을 생각하기보다는, 아내의 부정만 아니었으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어린 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아내에게 지우게 해야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을 게이조였기에, 무서운 일을 벌일 결심을 했던 것이리라.
나쓰에... 결국 사건의 모든 원인은 이 여자로 인해서 벌어지게 되었다.
무라이와 함께 있기 위해 어린 루리코를 밖으로 내몰지만 않았어도, 게이조는 그런 무섭고 잔인한 생각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나쓰에 자신도 루리코를 죽게 했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한다.
게이조가 생각하고 있던 것처럼, 루리코를 죽게 한 책임은 직접적이지는 않아도 간접적이나마 나쓰에에게도 있었으니까....
그 부분에 있어선 나 역시 게이조와 같은 생각이다. 여기까지 조금 틀린 견해가 있었다면, '나쓰에가 루리코의 죽음에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걸 보면서, 그래도 양심이 있고, 인간미가 있는 여자구나. 동정이 간다.'란 생각을 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시간이 갈수록, 책장을 넘길수록 나의 이러한 생각은 점차 퇴색되어 갔다.
'독한 여자군.. 어쩌면 저렇게 잔인할 수가 있을까... 무서운 여자야...'란 생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나쓰에는. 요코를 제일 못살게 괴롭힌 장본인이다.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모습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도가 지나쳤다.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동정을 받을 수 없을 만큼 잔인한 여자다. 정말 동정 받을 가치도 없는 인물이 아닐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난 나쓰에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어처구니없는 생각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물론 루리코의 죽음 때문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서 요코를 원망의 대상으로 삼아 괴롭히는 걸보고 '그럴 수도 있지'라는 동정의 감정으로, 무마 시켜도 될 만큼 이해할 법하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또 말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녀의 히스테릭하고 비정상적인 행동이 한 사람의 영혼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또 얼마나 외롭게 하는지 나쓰에 자신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했던 행동 그대로 자신이 당해보라고 하면 아마도 그녀는 한시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원망의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던 요코의 심성을 보면...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게이조와 나쓰에.
사랑하는 부부로 맺어졌던 두 사람은 한 순간의 실수로 철천지원수보다 더한 원수 같은 관계로 변모되어 갔다. 남편의 흉계를 알아챈 나쓰에는 심한 굴욕감에 치를 떨게 되고.. 남편이 원하는 모습으로 있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게 된다. 남편의 비밀을 자신이 알아버렸다는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 채 남편의 간계로 키우게 된 요코를 미워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죽은 루리코를 대신하여 지극한 사랑을 주었던 그녀였건만, 살인자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냉혹하고 잔인하게 요코를 괴롭히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극과극의 모습을 보이는 나쓰에를 보면서 혀를 내두르던 순간이기도 했다.
나쓰에와 게이조가 서로에 대한 복수를 비밀에 부친 채 진행시켜가고 있다고 여기는, 이 시점에서부터 비극은 시작된다.
그들의 어리석은 복수심이 한 인간을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제 요코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요코... 불운의 아기. 루리코를 대신하여 게이조의 집으로 입양되어진 비운의 아기.
이 집안의 모든 증오와 복수의 대상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택되어 키워진 아이..
살인범의 딸이라고 하기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너무나 착하고 맑은 심성을 지닌 아이가 바로 요코이다.
요코는 바르고 선량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할 정도로 마음에 한치의 오점도 허용치 않는 결벽성을 지닌 소녀였다. 나쓰에에게서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꿋꿋하고 당당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이유에서였다.
그런 그녀였지만, 게이조들의 간계로 인해 결국 그녀는 무너지고 만다.
그렇게 자부했던 자신의 마음에도 자기가 의식하지 못한 빙점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자각한 순간, 요코는 죽음을 결심하게 된다. 오직 그 빙점은 죽음으로써만 보상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유서를 통해 보여진 그녀의 글에서 여실히 그 사실은 드러나게 된다.
살인자의 딸이라는 지울 수 없는 빙점을 갖고 있었다는 요코의 마지막 말은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에 후회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빙점...빙점...빙점.... 살인을 한 아버지의 죄과는 결벽성 짙은 소녀의 가슴속에 지울 길 없는 오명으로 남겨지게 된 것이다. 요코는 그걸 못 견뎌했다. 살아서는 절대로 씻을 길 없는 빙점이기에...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을 꺽어버린것이리라.
가엾은 요코... 그 빙점은 결코 요코가 원해서 얻어진 것은 아닌데... 요코는 자신의 죽음으로써 루리코의 죽음에 대한, 그리고 살인자 아버지의 행위에 대해 용서를 빌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결백하다고 믿었던 마음의 유일한 오점인 빙점을 지우려 했던 것이다.
요코는 참으로 훌륭한 성격의 소유자다.
나 같았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그들에게 한치의 원망도 없이, 죽음으로써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려 했으니 말이다.
정작, 그들에게 당연히 용서를 받았어야 할 그녀였는데도 말이다.
범인의 딸이 아니란 것이 나중에 밝혀졌을 때는 더욱 더 그녀의 마음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살인범의 딸이 아니면서, 살인범의 딸로 키워졌던 그녀의 마음 고생이 결국 보상은 받지도 못하고, 비극적인 결말로 끝이 나려고 하니 어찌 안타깝지 않으리요..
진실은 밝혀졌지만.. 뒤늦게 후회한들 소용없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 버린 꼴이 되었으니...
어른들의 어줍잖은 이기심으로 그렇게 죽어갔던 요코.
그녀가 설사 의식에서 깨어난다 해도 다시는 예전의 생활로는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복수심과 증오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길 수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천성적으로 선량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지닌 요코가 이기적인 어른들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보면서 더욱 절감할 수 있었던 사실이다.
아내에 대한 복수. 그런 남편의 의도를 알고 난 아내의 또 다른 냉혹한 복수 사이에서 순수한 영혼을 지닌, 소녀의 가슴에 지울 길 없는 상처가 남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내심 놀랐었다.
게이조와 나쓰에는 요코의 자살미수로 자신들의 생각이 얼마나 무모하고 잔혹했던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요코에게 얼마나 부끄러웠을 것인가. 그리고 또 얼마나 미안했을 것인가.
나중에라도 자신들의 잘못을 알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본다. 그래도..양심은 있군..
십여년을 범인의 딸로 키워져야 했던 요코의 인생도 참 기구한 것 같다.
정작 범인의 딸이 아니었음이 밝혀졌을 때는 그녀는 생사를 넘나드는 고투를 치르고 있었으니.
다카키가 좀더 일찍 요코의 출생비밀을 얘기했더라면, 빙점의 내용은 또 달라졌을 것인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요코가 너무 안되어서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어쨌든 다카키의 진술로 모든 오해와 갈등은 다 풀렸으니 앞으로는 요코에게는 좋은 일만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저마다 드러나지 않는 빙점이 내재해 있다.
자신이 지닌 빙점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양심이 메마른 사람들은 빙점의 존재여부에 대해 생각조차도 않겠지..
세상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나쓰에처럼 파렴치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게이조처럼 냉혹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도루처럼 자상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다카키처럼 듬직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요코처럼 곱고 맑은 심성을 지닌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도 빙점은 존재한다. 다만 그 빙점의 존재를 의식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의식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인간적인 심장을 지닌 사람이요..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들일 게다.
난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빙점이라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녹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에겐 심장이 얼어 있을 틈이 없을 거라는 것을...
진정 믿고 싶어진다....
우리들은 요코처럼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녀 한치의 오점도 가슴에 남기지 않는 삶을 살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