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꼭 지키는 세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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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가문은 이라크를 부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인지 부자가 대를 이어 이라크를 때려 부수고 있다. 며칠 전에 채신은 이번 전쟁에서 미국이 이길 거라고 했다. 나 또한 그 말에는 동의했지만 채신이 왜 미국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지 지나가는 투로 물어 보았다.
“왜 미국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미국은 영어를 하잖아.”
나는 그 어이없는 대답에 한동안 얼빠진 눈으로 채신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린 후에 나는 다시 물었다.
“영어를 하는 것과 전쟁에서 이기는 게 무슨 관계가 있어?”
“왜 관계가 없어? 영어는 국제 공용어야.”
채신은 그런 바보다. 그런데 어떡하다 보니 내가 그 바보와 결혼하는 게 기정사실로 되어 버렸다. 오늘은 둘이 같이 채신의 부모님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나는 TV를 끈 후 옷을 갈아 입고 집을 나왔다. 시계를 보니 3시였다. 약속시간인 4시까지는 충분히 채신이 일하고 있는 학원앞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시 40분에 채신이 강사로 일하고 있는 종로에 있는 학원 앞에 도착했다. 20분이나 더 기다려야 하다니 너무 빨리 도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채신한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 지금 니 학원 앞에 와 있거든.”
“4시에 만나기로 했잖아?”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 도착했다고. 일 다 끝났으면 내려와.”
“우린 4시에 만나기로 했어.”
“글쎄, 그건 나도 안 다니까. 일 다 끝나지 않았어?”
“일은 다 끝났어.”
“그럼 지금 내려와도 되잖아?”
“우린 4시에 만나기로 했어. 4시에 내려갈게.”
채신은 전화를 끊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학원으로 쳐 들어가 채신이를 개 끌 듯이 끌고 내려오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그러나 나는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무래도 사람 보는 눈도 있고 하니 그냥 참으면서 기다리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잘 하는 일이라고는 참는 일이다.
4시가 되자 채신이 파란 눈의 외국인 남자하고 같이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남자는 키만 멀대같이 컸는데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채신과 얘기하면서 연신 웃고 있었다. 물론 둘은 영어로 대화했기 때문에 나는 둘의 대화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채신이 하는 말에 배꼽이 빠지도록 웃는 것을 보면 그 또한 대단한 멍청이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둘은 계단을 다 내려와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멀대같은 남자는 see you tomorrow라는 인사말을 하고 떠났다.
“왜 이렇게 늦게 내려 와?”
나는 재수 없는 남자가 떠나자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난 늦은 거 아냐. 지금 정각 4시라고.” “아까 전화 걸었을 때 일 다 끝났다고 했잖아? 그럼 일찍 내려올 수도 있는 거 아냐? 여기서 20분이나 기다렸다고.”
“사람은 시간을 잘 지켜야 돼. 내가 우리나라 사람들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게 뭔지 알아? 도무지 시간을 지킬 줄 모른다니까. 니 친구 남들이 그 인간은 내가 그렇게 수업시간에 늦지 말라는 데도 매번 늦는다니까.”
“난 지금 늦게 온 게 아니잖아?
“일찍 온 것도 시간을 안 지킨 건 마찬가지야. 그러니 앞으로는 시간을 좀 지키도록 해. 4시에 만나기로 했으면 4시에 오라고. 괜히 일찍 와서 시간낭비 하지 말고.”
“내가 여기서 시간 낭비한 건 순전히 너 때문이잖아? 아까 전화했을 때 일 다 끝났다면서 도 니가 안 내려왔잖아? 대체 왜 안 내려 온 거야? 그 멀대같이 키만 큰 코쟁이랑 얘기하는 게 그렇게 재밌었냐?
“약속시간이 4시라서 4시에 내려왔을 뿐이야.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이 이 다음에 성공하거든.”
나는 하도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채신의 뺨을 한 대 올려 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참기로 했다. 내가 생각해도 난 정말 참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한다.
“가자.”
채신이 말했다.
“가기 전에 한 가지 할 얘기가 있어.”
“뭔데?”
“난 결혼한 후에도 절대로 운전은 배우지 않을 거야. 만약 니가 나한테 운전을 배우는 것을 강요한다면 너랑 이혼할 거야.”
“넌 지금 그게 이혼사유가 된다고 생각해?”
채신이 요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안돼? 성격차인데. 사람들이 이혼하는 이유중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게 뭔지 알아? 그건 바로 성격차이라고. 니가 내가 절대적으로 지키고 있는 두 가지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운전을 안 배우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뭐라고 하지 않으면 나머지는 다 니가 하자는 대로 하겠어.”
“정말이야?”
“그래.”
“그럼 내가 신혼여행을 가고 싶어하는 나라로 신혼여행을 갈 거야?”
“물론. 어디로 가고 싶은데?”
“영국.”
뜻밖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조금 생각을 하니 오히려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신은 이 세상에 있는 나라중에서 영국을 가장 좋아했다. 채신이 영국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영국이 영어의 본고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채신은 그 단 한가지 이유 때문에 영국을 세계 최고의 나라라고 생각한다.
“영국으로 갈 거야?”
“그래.”
나는 대답을 하면서 우리의 신혼여행은 엉망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영국은 날씨가 안 좋기로 유명한 나라다. 그런 곳으로 신혼여행을 가자고 하다니? 확실히 채신은 바보다.
우린 채신의 집으로 가려고 채신이 차를 세워 놓은 곳으로 가서 차에 올라탔다.
여기서 혹시 당신들이 내가 꼭 지키고 있는 세 가지가 무엇인지 궁금해 할 지도 모르니 그걸 잠깐 얘기하고 넘어가겠다. 내가 꼭 지키고 있는 세가지는 첫째, 해가 서쪽에서 뜨는 한이 있어도 극장엔 혼자 가서 영화를 본다는 것이다. 나는 절대 다른사람하고 같이 영화를 보러 가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지키다가 처음으로 사귄 여자친구하고 헤어졌다. 제대를 하고 복학을 했을 때, 대학 4년동안 연애 한 번 못해 보고 졸업하는 것은 너무 비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이쁘장하게 생긴 후배한테 대쉬를 했었다. 그녀는 나의 마음을 받아들였고, 우린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었다. 그녀가 사달라는 것은 다 사 주었고, 그녀가 가자는 데는 다 가 주었다. 여름방학에 노가다를 해서 번 돈으로 그녀한테 50만원이나 되는 고가의 옷을 사 주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그녀한테 한가지 해 주지 않은 일이 있는데 그것은 극장에 영화를 같이 보러 가는 거였다. 그녀는 영화광이었다. 그래서 나한테 영화를 같이 보러 가자는 말을 많이 했는데 나는 그 때마다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었다. 내가 그렇게 계속 거절을 하자, 그녀는 내가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나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단지 나는 극장에 다른사람과 같이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을 싫어할 뿐이다. 내가 영화를 싫어하는 줄 알고, 더 이상 영화를 보러 같이 가자고 하지 않던 그녀는 언제인가 표를 두 장 구해 가지고는 이 영화는 정말 괜찮은 영화라며 나랑 꼭 같이 보고 싶다고 했다. 오빠랑 같이 보지 않는다면 정말 후회할 것 같다면서. 나도 그 영화가 괜찮은 영화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영화를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사람과 극장에 같이 가는 것을 무지 싫어하기 때문에 그녀한테 또 일이 있다며 핑계를 대고는 다음날 혼자서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다. 그런데 극장에 그녀가 선배와 함께 영화를 보러 와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머리 끝까지 화를 내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나를 끌고 상영관 밖으로 나왔다.
“오빠, 여긴 왜 온 거야?”
그녀는 화가나서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왜 오긴? 영화보러 왔지.”
그녀는 기가 막히다는 나를 쏘아보더니 폭발했다.
“난 오빠가 영화를 싫어하는 줄 알았어!”
“영화를 싫어하진 않아. 난 항상 극장에선 혼자 영화를 봐. 여태까지 쭉 그래왔어. 그러니까 니가 좀 이해해 줬으면 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세상에 여자친구랑 같이 영화도 보지 않는 남자가 어딨어?”
“니가 좀 이해해 주면 안 돼. 난 니가 하자는 대로 다 해 줬잖아? 니가 사 달라는 걸 다 사줬고, 니가 가자는 데를 다 갔어. 그러니 너도 내가 바라는 거 하나 쯤은 들어줘야 하는 거 아냐?”
“우린 지금 사귀고 있어!”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나도 알고 있어.”
“근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가 어딨어?”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야? 그리고 난 니가 지금 왜 화를 내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내가 다른 여자랑 같이 영화를 보러 온 것도 아니잖아? 오히려 니가 선배와 영화를 보러 왔잖아?”
“오빠가 같이 영화를 보러 가지 않는다고 해서 그 선배랑 같이 온 거야. 그 선배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누가 뭐랬어? 내가 니가 다른 선배와 같이 영화를 보러 온 것을 이해하는 것처럼 너도 내가 혼자서만 극장에 오는 것을 이해해 주었으면 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우리 그만 헤어져. 내가 그렇게 영화를 같이 보자고 했는데도 매번 핑계를 대다니? 오빠는 날 사랑하지 않는 게 분명해. 그러니 그만 헤어져.”
“그런 게 아니라니까. 내가 널 사랑하지 않으면 니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었겠어? 방학 때 노가다 해서 번 돈으로 니 옷도 사 줬잖아?”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라 오빠랑 같이 영화를 보는 거야. 오빠는 날 사랑하지 않는게 분명해. 그러니 우리 헤어져.”
“그래. 헤어져. 넌 욕심이 너무 지나쳐. 그렇게 많은 것을 널 위해 해 줬는데 한가지도 날 위해 양보를 하지 않잖아? 헤어지자고. 나도 더 이상은 너한테 양보할 수가 없으니까.”
우린 그 날 그렇게 싸우다가 영화도 보지 못했고, 다시는 서로 만나지 말자며 헤어졌다.
내가 지키고 있는 두번째는 코카콜라를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콜라가 아니라는 것에 주의하기 바란다. 콜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펩시는 가끔 마신다. 내가 입에 대지 않는 것은 코카콜라다.
두 번째 사귄 내 여자친구는 미국콜라와 맥도날드를 끔찍히 싫어하며 입에 대지도 않는 운동권학생이었는데 그녀는 내가 콜라를 마시지 않는 것을 알고는 나한테 반했다. 하지만 그녀는 잘못 안 것이었다. 나는 펩시는 가끔 마시는 사람이었으니까.
어쨌든 펩시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그녀에게 내가 콜라를 마시는 모습을 들키지 않고 그녀랑 6개월을 사귀었는데 모든 일이 꼬리가 길면 밟히듯이 결국 나는 그녀한테 콜라를 마시는 모습을 들켰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더니 나한테 배신을 당한 것처럼 엄청 분에 하며 물었다.
“지금 뭘 마시고 있는 거야?”
“보면 몰라. 콜라 마시잖아.”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당당하게 말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펩시콜라 마시는게 무슨 죄라고?
“나는 니가 콜라를 안 마시는 줄 알았어.”
“내가 안 마시는 건 코카콜라야. 펩시는 가끔 마셔.”
“펩시도 미국 거야.”
“알고 있어.”
“뭐? 알고 있다고? 그걸 아는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콜라를 마실 수가 있어?”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콜라 마시는게 무슨 대역죄나 진 거처럼.”
“난 니가 콜라를 마시지 않길래 반미주의자인줄 알았어.”
“그런 멍청한 말이 어딨어? 콜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이 다 반미주의자면 그럼 콜라 마시는 사람은 다 친미주의자냐?”
“나쁜 놈.”
그녀는 갑자기 나의 뺨을 후려쳤다. 운동권 학생이라서 그런지 갑작스런 그녀의 일격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팠다. 태어나서 여자한테 처음 맞는 거라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녀를 흠씬 두들겨 패 주고 싶었지만 착한 남자는 여자를 때리는 게 아니란다라는 아버지의 말이 떠올라 꾹 참았다.
“넌 날 속였어.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마.”
그녀는 찬바람이 일 정도로 휑하니 돌아서 걸어갔다. 나는 그렇게 그녀와 헤어졌다.
마지막으로 내가 지키고 있는 또 한 가지는 운전을 배우려 하지 않는 거였다. 채신은 내가 운전을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을 못 마땅해 했지만 그렇다고 나한테 운전을 배우라고 강요한 적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벌써 채신과 헤어져도 몇 번은 헤어졌을 것이다. 사실 내가 이전에 사귄 두 명의 여자보다 훨씬 더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채신과 3년이란 오랜 시간을 사귄 이유는 채신이 내가 지키고 있는 세가지에 침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극장에 혼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은 그녀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질 않았다. 채신은 자막도 뜨지 않고 배우들이 오직 영어로 대화하는 영화만을 본다. 그녀는 똑같은 내용의 영화라도 한글자막이 뜨는 영화는 작품의 질이 떨어진다고 안 보며 특히 TV에서 성우들이 우리말로 더빙한 외화는 들어줄려고 해도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다며 안 본다. 그녀는 영화의 작품성과는 전혀 관계없이 배우들이 영어로 대화하는 영화만을 최고의 영화로 생각한다. 바보같은 영화감상법이지만 나한테는 더없이 도움이 된다. 내가 지키고 있는 첫번째인 극장엔 혼자가서 영화를 본다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영화감상법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키고 있는 두 번째인 코카콜라를 마시지 않는 것을 그녀는 처음에는 이해하질 못했다. 처음에 그녀는 코카콜라처럼 맛있는 음료를 마시지 않는 나를 미개인을 보듯 쳐다보았다. 그러나 내가 펩시도 미국에서 만든 거야 라고 말하자 그녀는 ‘어쩐지 펩시도 맛있다 했더니 그래서였군. 역시 영어를 쓰는 나라는 달라도 뭐가 다르다니까.’ 하며 내가 코카콜라를 마시지 않는 것을 취향이라며 이해했다. 그녀는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만든 먹거리는 죄다 맛있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다.
마지막으로 운전은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운전을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을 못 마땅해 했지만 그렇다고 운전을 배우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 부분만은 솔직히 채신한테 고마워 하고 있다. 내가 유일하게 채신한테 고마워 하는 것은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