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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준은 구상중
오늘도 9시 뉴스 첫 소식은 미국과 이라크의 게임이다. 게임의 대명사인 스타크래프트를 못할 정도로 게임엔 별로 관심이 없어 채널을 돌렸다. 이번엔 시트콤이다. 오버연기 역시 관심이 없어 또 채널을 돌렸다. 페루의 곤충사업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세상엔 별의 별 사업이 다 있구나 생각을 하며 다시 채널을 돌렸다. 나는 사업에도 별 관심이 없다. EBS에선 세계문학기행 괴테편이 하고 있었다. 스무살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역시 명작은 다르다며 무한한 감동에 빠졌었다. 작년 서른 때 다시 그 소설을 읽고 ‘이게 명작이라는 거야? 더럽게 재미없는데.’ 하고 실망을 했다. 스무살때의 내가 도저히 이해되질 않았다. 나는 결국 TV를 끄고 현준이 방으로 갔다. 현준은 두 시간째 컴퓨터를 켜고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넌 아까부터 뭐 하는 거냐?”
“구상중이야.”
“또 구상중이군.”
나는 비아냥거렸다.
“이젠 구상은 그만 끝내고 제발 한 줄이라도 좀 쓰지 그러냐?”
“아직 남들이 얘기를 어떤 방향으로 써야 할지 결정 못했어.”
“남들이? 남들이 얘기를 쓸 생각인 거야?”
나는 조금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을 거 같지 않아?”
“웃기긴 하겠군.”
“단순히 웃기기만 한 얘기가 아니라고. 성공의 기준을 든든한 직장과 안정된 생활이라고 볼 때 사실 우리 셋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은 남들이잖아. 나야 백수고 너는 별 볼일 없는 수학선생인데 비해 남들이는 알아주는 회사에 다니고 있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으니까. 어쩜 말야, 남들이처럼 모든 일을 남들을 따라서 하는 게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인지도 모른다고.”
현준이의 궤변은 또 꽤 설득력이 있었다. 대학을 다닐때 나는 그한테 ‘세상에 비행접시(UFO)가 있을까’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믿는 사람한테는 있는 거고 믿지 않는 사람한테는 없는 거야.”
“무슨 말이 그래?”
“투명인간이 있다고 믿니?”
“아니.”
“그럼 너한테는 투명인간이 없는 거야.”
“그럼 넌 투명인간이 있다는 거야?”
“그거야 신(神)만이 알겠지. 근데 넌 신이 있다고 믿니?”
“아니.”
“그럼 너한테는 신도 없는 거야.”
“그럼 넌 신이 있다고 믿는 거야?”
“나는 어떤 때는 신이 있다고 믿으니까 그 땐 신이 있는 거고 어떤 때는 신이 없다고 믿으니까 그 땐 신이 없는 거지. 투명인간도 비행접시도 다 마찬가지야. 어떤 때는 있다고 믿으니까 있는 거고, 어떤 때는 없다고 믿으니까 없는 거지.”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가 너하고 말장난이나 하쟀어?”
“말장난이라니?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인간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믿는 것을 본다는 얘기라고.”
나는 그 때 현준이의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예를 들면 이런 거야. 중학생이었을 때 반에서 짱이라는 아이가 살해당한 일이 있었어. 목격자는 그 애 꼬붕뿐이었는데 그는 투명인간이 짱을 죽였다고 하면서 벌벌 떨었지. 나중에야 범인이 밝혀졌는데 그 짱이라는 아이를 죽인 사람은 둘이서 허곤날 괴롭히던 아이였어. 꼬붕이란 아이는 분명 그 아이가 짱을 죽이는 것을 봤는데도 아무리 괴롭혀도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그 멍청한 아이가 짱을 죽였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거지. 그래서 꼬붕은 그 아이가 짱을 죽이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봤다는 사실을 뇌에서 인식하지 못했고, 투명인간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게 된 거라고. 결국 인간은 그처럼 믿지 못하는 것은 보고 있어도 죽어도 못 보는 거야. 자신이 믿는 거만 보는 거라고.”
놀라운 말이었다.
“그럼 니 말은 개개인마다 믿는 것이 다 다르니 변하지 않는 진실은 없다는 얘긴데...”
나는 그의 말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아니.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한 가지 진실이 있어.”
“그게 뭔데?”
“거짓말은 나쁘다는 거지.”
무슨 얘긴가 생각하던 나는 조금 후 현준이한테 또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넌 사람을 속이는 게 그렇게 재밌냐?”
“그거야 난 소설가 지망생이니까. 소설가는 거짓말로 먹고 사는 사람이거든. 그리고 사실 세상에 거짓말처럼 재미있는 것도 없다고.”
그의 말은 그처럼 시작은 언제나 나한테 신선한 충격을 주었지만 끝에 가선 언제나 나를 열받게 했다. 이번에도 대화가 나를 열받게 하는 상황으로 향할 것 같은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며 내가 물었다.
“그럼 빨리 남들이에 대해 글을 쓰지 그러냐?”
“하지만 역시 성공의 기준은 그게 아닌 것 같아.”
“그럼 뭐가 성공의 기준인데?”
“그걸 모르니까 지금 구상중인 거 아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더 물어볼 가치를 못 느낀 나는 현준을 놔 둔 채 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드러 누웠다. 남들이 생각이 났다. 남들이는 멍청한 인간일까? 현명한 인간일까?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다시 남들이 얘기를 해야겠다. 남들이는 선택의 길이 여러개 있을 때 다수의 사람이 선택하는 길을 선택하며 남들이 하니까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남들이 사상으로 남들이는 사실 별 어려움 없이 무난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남들이한테도 한차례 위기는 있었다. 그건 작년 대선때였다. 사실 작년 초만 해도 남들이는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될 거라면서 자신은 이회창 후보를 찍을 거라고 했다. 그 때까지 이회창 후보가 남들이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고 그것이 그가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상황이 변했다. 대선에 뛰어든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와 단일 후보를 내세우기로 합의를 본 후 노무현 후보가 단일 후보로 결정되자 여론조사 결과 노무현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앞서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남들이는 그러자 대선때 노무현 후보를 찍겠다고 말했다. 역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남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남들이는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누가 될 지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선을 하루 앞두고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정몽준 후보가 돌연 노무현 후보 지지를 철회했던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 상황에 남들이는 당황했다. 그가 당황한 이유는 더 많은 남들이 표를 던지는 후보한테 자신의 표를 던져야 하는데 정몽준 후보의 노무현 후보 지지 철회로 어떤 후보가 더 많은 표를 받을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는데 있었다. 당황한 남들이는 나한테 전화를 했다.
“넌 누가 될 거 같니?”
나는 그의 물음에 어이가 없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남들이의 전화를 받기 전 난 학교 선생 몇 명 한테서 전화를 받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나한테 누굴 찍을 거냐고 물어봤지, 누가 될 거냐고 물어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될 거 같냐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난 이렇게 어려운 일은 처음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누가 될 지를 모르겠다니까.”
“야, 그렇게 어려우면 차라리 투표를 하지 말지 그러냐?”
나는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건 안 돼. 투표율이 50% 미만일리는 없거든. 근데 정말 누가 될 거 같아?”
“몰라. 난 그리고 투표 안 할 거야.”
나는 남들이가 한심해서 쏘아붙였다.
“너 투표는 해야 돼. 남들이 하잖아.”
남들이는 전화를 끊었고 다른 사람한테도 전화를 걸어서 누가 대통령이 될 거 같냐고 물었다. 결국 남들이는 전화 통화로 얻은 결과로 노무현 후보를 찍었다. 그리고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기뻐하며 남들이 마시는 만큼 술을 마셨다. 남들이는 그렇게 자신만의 독특한 남들이 사상으로 한 번도 실패를 하지 않았다. ‘실패를 하지 않는 사상이라?’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남들이가 갑자기 위대하다고 느껴졌다. 구상중인 현준이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