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이제 막 피아노 콩쿠르 대상을 타고 황급히 걸어나오는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지금 누가 제일 먼저 떠오르나요?”
그녀는 문득 가슴이 찡하고 코끝이 시려온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발걸음이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열여섯의 봄. 학교 앞 화단에 심어놓은 풀꽃에서 하얗고 붉은 향기가 가득 올라오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사월 끝자락이었다.
_?xml_: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체육대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무렵 그들은 수업이 끝나면 해가 질 때까지 운동장에 남아 반 대항 피구 연습을 하곤 했다. 반에서 다섯 번째로 키가 작은 그녀는 공으로 하는 모든 경기가 싫었다. 맞으면 아픈 느낌은 물론이거니와 잡으려고 하면 용케 빠져나가는 공 때문에 당한 창피함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는 날마다 운동장에 내려 가야할 순간이면 손끝이 저려오곤 했다.
그는 반에서 제일 키가 컸다. 체육대회만 나갔다하면 1등은 항상 그의 차지였다. 또래 남자들에 비해 보기 드물게 희고 잘생긴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여자 아이들이 따랐다. 누구에게나 서스럼 없이 장난을 치고 다정한 눈으로 서글서글하게 웃는 그를 모두가 좋아했다.
그 날 그들은 붉은 노을이 깔리는 운동장 한복판에 서있었다.
그녀는 졸음에 겨운 멍한 눈동자로 코트 위의 공을 응시하고 있다. 마침내 땅을 박차고 치솟은 공이 하늘높이 튀어 올랐다. 그 때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고 나타난 기다란 손가락이 재빠르게 공을 낚아챘다. 코트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이 공을 잡은 손가락에 집중되었다. 누군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모든 아이들이 선망하는 그의 공. 한 치의 흔들림 없는 그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날아가 닿는 순간. 그의 손을 떠난 공이 그녀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어, 어, 어... 오...오...온다, 온다. 온다 오.....흡...
퍽. 피부를 파고드는 공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녀는 부모의 품을 파고드는 아이를 향해 팔을 벌리듯 와락 공을 끌어안았다.
그녀가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운동장을 크게 울리는 박수와 환호소리가 들려왔다. 공을 끌어안고 멍하니 서있는 그녀는 모든 게 그저 잠깐의 꿈같았다. 그와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 그가 눈을 찡긋하고 돌아섰다.
코트로 달려가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고 생각되는 건 단순히 그녀의 기분 탓이었을까. 딱딱하고 차가울 것 같았던 공은 예상과는 달리 이상하리만치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따뜻했다. 공을 쥔 손이 근질근질했다. 그녀는 연신 코끝을 문질렀다.
그녀는 왜인지 오래도록 그 공을 놓고 싶지 않다. 마치…누군가 실수로 떨어뜨리고 간 선물을 쥐고 있는 것처럼. 매일 똑같은 날의 연속이었다. 가끔 다른 날도 있었다. 때때로 공은 그녀에게 날아오기도 하고 그에게로 날아가기도 했다. 그녀는 더 이상 공이 두렵지 않았다.
하늘은 더욱 푸르고 열어놓은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따금 매미 소리로 수업이 중단되기도 했다.
그 해 6월에는 유난히 많은 비가 내렸다. 등굣길에 하늘이 흐린 날이면 오후에는 세찬 소나기가 퍼부었다. 교실은 날마다 묵직한 습기가 차있었고 아이들의 젖은 머리에서 나는 샴푸 냄새와 교복에 배어나온 체취가 혼합된 독특한 비 냄새가 났다.
그는 비오는 날에만 버스를 탔다. 그녀가 하굣길에 빗물이 떨어지는 버스 정류장에 서있노라면 저 멀리 횡단보도를 건너 정류장으로 걸어오는 그가 보였다. 정류장을 가득 메운 우산 틈으로 보이는 그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거나 때때로 의자에 앉아 버스가 올 때까지 고개를 길게 내밀고 있기도 했다.
그는 날마다 같은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서 마주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버스에 올라탄 아이들 틈새로 보이는 그의 흰색 가방은 버스가 떠난 아스팔트 바닥 위로 하얀 잔영을 만들어놓곤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녀는 횡단보도에서부터 열심히 눈을 굴리기에 바빴다는 것도.때때로 그녀가 일부러 몇 대의 버스를 놓치곤 했다는 사실도 그는 알지 못한다. 아마 그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하나둘씩 먼저 보내는 버스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녀에게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마음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은.
유월 중순이 되자 녹음이 짙어졌다. 비는 하루걸러 이틀씩 내렸다.
모두가 고대해온 날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체육대회, 오전 내내 짙은 잿빛 하늘이 오후가 되자 거친 바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굵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쏟아진 소나기. 비명을 지르며 교실을 향해 달려가는 아이들로 아수라장이 된 운동장에서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밀치는 통에 그녀는 정신이 혼미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린다.
교실까지의 거리가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가까스로 찾은 커다란 나무 아래 쓰러지듯 몸을 기대는데 그녀의 귓가를 때리는 익숙한 목소리. 변성기를 갓 지났을까. 낮게 깔린 목소리가 말했다.
“야. 괜찮아?”
올려다본 하늘에 그가 서있었다. 그는 두 팔을 벌려 그녀의 머리 위를 가려주고 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한 그의 눈. 그녀는 그 순간 거짓말처럼 잎 사이로 쏟아지는 비가 멎은듯하다.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시끄러운 빗소리도 아이들의 비명소리도 사라졌다. 그의 머리에서 떨어지는 빗줄기가 그녀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에 비에 젖은 그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며 런닝 자국이 비치는 체육복이 들어왔다.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어른스러운 척 애쓰는 소년 같이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크...”
“웃기는.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냐. 너는?”
“미안해. 풉... ”
“하여간에 못 말린다니까.”
그도 비로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때 그녀의 머릿속으로 한없이 투명하고 새파란 파도소리가 밀려왔다. 그 날 그와 그녀는 입속을 타고 흐르는 빗줄기도 아랑곳 않고 그 자리에 한참을 그렇게 함께 기대어 있었다.
수업시간에 그녀는 이따금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묶어 올리곤 했다. 물결이 일렁이듯 부드러운 연한 갈색 머리칼 속에 숨어 있다가 가끔 모습을 드러내는 붉은색 머리카락. 그는 때때로 그녀가 지는 놀이 퍼뜨리는 따스한 빨강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고백하고 싶었다. 마음 깊은 곳에 그녀를 향해 뛰고 달리는 이상을 담아.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좋아하고 있어. 너만 생각하면 극심한 긴장 때문에 배가 아프고 밥 먹다가 생각이 나서 혓바닥이 온통 딱딱하게 굳어버릴 것 같아.
그는 지금 이토록 뛰고 달리는 이상도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리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이번 겨울이 가면 다른 세상과 만나고 그와는 다른 길을 걸을 것이다. 후에 그가 어디서 학업에 열중을 하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사회에 이바지 할지 그녀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그녀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슬픔이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졸업식 전 날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떠난 운동장 위로 비와 눈이 한데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버스 정류장에는 그와 그녀 둘 뿐이었다. 오늘이 가면 그들은 영영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놓았다. 몇 번을 쥐었던지 땀이 배어나왔다. 바짝 마른 그의 입에서 무뚝뚝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피아노 친다는 애가 손을 그렇게 내놓고 있으면 어떡하냐, 이리 줘봐.”
그는 꽁꽁 얼어 발갛게 물든 그녀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주머니 속으로 포개었다. 좁은 공간속에 한데 엉킨 차갑고 따뜻한 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버스가 도착하고 그녀가 올라탔다. 요금을 넣으려던 그녀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그를 향해 활짝 웃어보였다. 그녀를 실은 버스가 떠난 길 위로 그치지 않을 것 같은 새하얀 눈이 내렸다.
10년 후 눈 내리는 1월의 어느 날. 주머니 속 시린 손을 쥐었다, 폈다하며 입김을 훌훌 불어내던 그녀는 문득 10년 전 어느 날을 떠올린다. 그리고 마침내 붉은 노을이 깔린 운동장과 말랑했던 공의 촉감과 세상에서 가장 크게 느껴졌던 소년의 해맑은 웃음을 기억해낸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음악실 앞을 지나다가 홀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 그녀를 본다. 그녀의 음악이 울리는 세계가 춤을 추듯 우아하게 비틀리고 있었다. 반주 속에는 따스한 봄날 태양의 잔영.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여름 한 철의 푸르름. 열여섯 살 소년의 가슴을 울렁이게 만드는 눈이 부실 정도로 새파란 하늘 그리고 가슴이 시릴 만큼 하얗게 부서지는 그녀의 미소까지 그 모든 것이 한 데 녹아있다. 그는 오래전에 잃어버리고 잊은 무언가를 다시 찾은 느낌이다.
검은 건반을 누르는 희고 작은 손가락. 그는 누군가 잡아주지 않으면 부서질 것 같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싶었다.
한 두 방울씩 떨어지던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정류장이 보이는 횡단보도가 다가오자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 노란색 우산을 쓰고 서있는 그가 보인다. 그녀를 발견한 그의 얼굴에 미소가 스친다. 그들은 서로의 가슴이 떨리고 있음을 안다.
그녀는 그의 우산 속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흰 건반, 검은 건반. 또다시 흰 건반. 그녀의 발이 닿는 횡단보도가 만들어내는 음악이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