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방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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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8시다. 나는 창밖을 보고 있다. 밖에는 전봇대가 서 있고 전봇대에 매달린 전등에는 날파리들이 가득했다. 어디선가 갑자기 날아온 나방 한 마리가 전등을 삼켜먹을 듯이 전등에 계속 부딪히며 전등 주위를 날아다녔다. 나방은 야행성이면서 왜 불빛에 환장하는 것일까?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 때문일까? 어쩜 나는 나방보다 삶에 대한 열정이 없는지도 모른다. 내 가슴은 한 번도 뜨겁게 타오른 적이 없다. 벌써 서른 하나다. 이룬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딱히 무엇을 이뤄야 한다는 마음가짐도 없기에 오늘도 빈둥빈둥 시간을 보냈다. 출출했다. 부엌으로 가서 밥통을 열어보니 밥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찬장에서 라면을 꺼내 라면을 끓였다. 라면이 다 끓자 조그맣고 둥그런 밥상에 라면냄비를 올려놓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바닥에 놓여있는 리모콘을 들어 TV를 켰다. 재미없는 일일 연속극이 끝나고 뉴스가 방영됐다. 첫 소식은 이라크 전이었다. 바그다드에 번쩍이는 불빛과 섬광, 쾅쾅 터지는 폭음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고 있었다. 그 뉴스를 보면서 라면을 먹고 있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었다.
“나야, 뭐해?”
여자친구다. 나보다 두 살 위인 누나이지만 나는 그녀한테 말을 놓고 지냈다. 우린 3년째 사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랑 사귀게 된 것은 그녀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한 번도 그녀한테서 가슴 떨리는 사랑을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이라크전 봐.”
“축구해? 그럼 나도 응원해야 겠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입으로 넘어가던 라면이 도로 다시 튀어나왔다. 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축구엔 관심도 없는 여자였다. 우스갯소리로 남자들이 하는 얘기중에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얘기는 3위가 축구 얘기, 2위가 군대 얘기, 1위가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라는 말이 있듯이 그녀는 그 유머에 딱 들어맞는 전형적인 한국여자였다. 하지만 월드컵이 열리자 그녀는 오프사이드가 뭔지도 모르면서 대한민국팀을 열렬히 응원하는 광적인 축구매니아가 됐다. 그러고 보면 그녀의 애국심만은 정말 칭찬할 만하다.
“누가 이기고 있어?”
“우리나라. 1 : 0이야.”
그녀한테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다고 해도 아무런 관심도 없을 거 같아 그렇게 둘러대었다. 어차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여자였다.
“그럴 줄 알았어. 월드컵에서 4강에 진출한 나란데 이라크가 상대가 되겠어? 전반전이야, 후반전이야?”
“전반전. 거의 다 끝나가.”
“그럼 빨리 집에 가면 후반전이라도 조금은 볼 수 있겠네.”
“그럴거야. 그만 전화 끊자. 나도 축구봐야 하니까.”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라면을 다 먹고 상을 치우고 있을 때 현준이가 들어왔다. 나는 이 오피스텔에서 대학동창인 현준과 둘이 살고 있다. 현준은 백수이며 소설가 지망생이다. 그는 항상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직업이 소설가라고 떠벌린다. 그가 하는 말에 의하면 회사원은 결국 보람도 없는 회사일에 매달릴 뿐이니 돈은 그럭저럭 벌지 몰라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며, 연애인은 돈도 잘 벌고 사람들한테 인기를 얻기도 하지만 명성을 얻지는 못하고, -그런 까닭에 그들이 불렀던 노래나 그들이 출연했던 드라마나 영화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찾는 사람이 적어지므로 -연애인도 할 게 못 되고, 교수는 돈도 그럭저럭 벌고 때론 명성도 얻긴 하지만 일류급 연애스타들이 얻는 광적인 인기를 얻는데는 무리가 따르니 역시 할 게 못 된다고 하면서 소설가는 한 작품만 제대로 쓰면 돈은 평생을 먹고 살 만큼 벌 수 있으며, 사람들한테서 일류급 연애스타처럼 광적인 인기를 얻을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이름난 대학교수와 같은 명성을 누릴 수 있고, 또 명작은 시간이 흘러도 노래나 영화처럼 묻혀버리는 것이 아니라 재판되고 또 재판되니 역시 소설가가 최고로 좋은 직업이라면서 자신은 정말 이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없는 명작 한 편만을 쓰고 평생을 놀고 먹고 살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도 자신은 살아있는 동안 평생을 쓰고도 남을 돈을 벌고, 인기를 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죽어서도 자신의 이름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면서. 그러나 그는 아직도 단 한 편의 단편소설 아니 단 한 문장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인가 그가 하도 한심해서 물어보았다.
“니가 쓴다는 그 환상적인 소설은 대체 언제나 완성되는 거냐?”
“아직 구상중이야.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올 수 없는 전무후무한 작품은 그렇게 쉽게 완성되는 게 아니거든.”
현준은 그처럼 한심한 인간이었다.
현준은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조금 붉었다.
“술 마셨어?”
“응.”
“누구랑?”
“은혜.”
“이젠 은혜랑 술도 마셔? 은혜는 고등학생이잖아?”
“고등학생이 술 마신게 어제 오늘 일도 아닌데 뭘 그렇게 놀라? 오늘 화장을 하고 치마를 빼 입고 나왔는데 정말 숙녀티가 물씬 나더라. 확실히 요즘 애들은 발육이 빨라.”
은혜는 내가 근무하고 있는 여자 고등학교의 학생으로 내가 담임을 맡고 있는 아이였다. 하지만 나는 한동안 은혜가 우리학교 학생이라는 것도 내가 담임을 맡고 있는 아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현준이 덕이었다. 현준은 어느 날 집으로 들어오더니 고등학생을 사귀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젠 원조교제까지 하기로 했냐?”
“원조교제라니? 난 방황하는 청소년을 달래주는 것 뿐이라고. 늘 그래왔지만 요즘 세상은 청소년이 설 곳이 더욱 없거든. 그건 그렇고 그 애 이름 참 예뻐. 이름이 정은혜야. 정말 이쁘지 않니?”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때?”
“내가 고등학생이랑 사귀는 걸 반대하는 건 아니겠지?”
“니가 누구랑 사귀던 난 관심없어. 서로간의 사생활엔 관여하지 않기로 했잖아.”
며칠 후 현준은 또 은혜를 만나고 집으로 들어오더니 나한테 대뜸 물었다.
“너 정은혜라고 모르냐?”
“정은혜라니? 아, 니가 사귀고 있다는 그 고등학생 여자 말하는 거야? 그 애를 내가 어떻게 알아?”
“담임선생님이 너라는데?”
“응?”
“너 선생 맞냐? 어떻게 자기가 담임맡은 반의 아이가 누군지도 모르냐?”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래.”
나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말세야.”
다음날 학교에 가서 오랜만에 출석부를 뒤져보니 과연 정은혜라는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은혜가 나이 서른 하나인 내 친구를 사귀는 것을 알고서도 은혜한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청소년도 사생활은 있다는 것이 나의 신조다.
“밥은 없으니까 저녁 먹고 싶으면 라면 끓여 먹어. 난 들어가서 잘 테니까. 아, 그리고 내일은 니가 아침 당번이야. 안 하면 벌금이 얼만지는 알지?”
“가끔은 말이야. 난 정말 너한테 정 떨어진다니까. 너, 채신씨랑은 언제 결혼하냐?”
“내가 왜 그 여자랑 결혼을 해?”
“그 여자라니? 너랑 3년동안 사귄 여자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
“어쨌든 결혼하고 싶은 생각 없어.”
“채신씨가 싫은 거야? 아니면 결혼이 싫은 거야?”
“둘 다 관심없어. 그리고 너도 늘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말하잖아?”
“넌 정말 병이야. 좀 뭔가 니 가슴을 뜨겁게 태울만한 일을 찾아보지 그래?”
“내가 유일하게 하고 싶은 일은 세기의 명작으로 남을 니 소설을 읽는 거라고. 그러니 방에 들어가서 소설이나 쓰지 그래?”
“그 소설은 구상중이랬잖아? 세기의 명작은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게 아니라고. 걱정마. 니가 이승을 뜨기 전에는 반드시 완성할 거니까.”
“난 내일 죽을지도 몰라.”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