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친구
밤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해 떨어진 거리를 여기저기서 빛나는 불빛들이 비쳐주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사람들은 밤에 자지 않는다. 우린 도로를 달렸다. 운전은 언제나 지지리도 운전 못하는 채신의 몫이었다. 내가 할 일이라곤 그녀의 옆좌석에 안전벨트를 매고 앉아있는 것 뿐이었다.
“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도대체가 이해가 안 돼.”
“뭐가?”
난 생뚱한 얼굴로 물었다.
“넌 남자고 난 여자니까 니가 운전을 해야 하는 게 정상이라고. 남자는 여자를 보호해야 하는 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법이 어딨어? 그리고 정 그렇게 보호차원에서 따지면 니가 누나니까 동생인 나를 보호해 주어야 하는 게 정상이야.”
“넌 날 누나라고 생각하지도 않잖아?”
“내가 누나라고 부르는 걸 싫어하잖아? 누나라고 불러달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 앞으로 누나라고 부를까?”
“됐어.”
“근데 뭘 그래?”
나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 필려면 문 열고 펴.”
채신이 불평을 터뜨렸다. 나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틀어놓은 라디오에선 금연은 당신의 생명을 지키는 길입니다라는 공익광고가 흘러나왔다. 웃기는 공익광고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게 웃었다. 담배를 피지 않아도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런데 금연은 당신의 생명을 지키는 길이라니? 담배를 피지 않으면 좀 더 오래 살 수 있지 않냐고? 물론 그럴 수야 있겠지만 억겁의 세월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우리의 삶이란 불가 찰나인데 좀 먼저 죽고, 좀 늦게 죽는 것이 뭐가 그렇게 대수라고 금연, 금연 떠드는 것인지. 게다가 담배를 피는 사람이 담배를 피지 않는 사람보다 꼭 먼저 죽는 것도 아니다. 나쓰메 소세키-일본 근대 소설가로 대표작으로 나는 고양이로소다가 있음-의 고양이는 역시 인간보다 현명하다. 인간은 괜한 일에 너무 열을 올린다.
창문으로 담배재를 털었다.
“어제 이라크 전은 어떻게 됐어?”
“응?”
어제 이라크 전이라니? 이라크 전이 일어난지는 벌써 나흘째였다.
“축구 말이야. 집에 들어가니까 축구가 끝나 있더라고. 이겼어?”
“아, 그거? 신문 안 봤어?”
“안 봤으니까 묻는 거 아냐?”
그녀는 어쩌다가 신문을 안 본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그녀는 절대로 신문을 보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한 번도 신문을 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주 가끔씩이라도 신문을 본다면 이라크전이 축구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것을 나흘이 지나도록 모르고 있을리가 없었다.
“1 : 0 으로 이겼어.”
“역시 대한민국 축구팀이야. 붉은 악마들의 응원도 대단했겠지.”
“물론.”
그녀는 늘 자신이 대한민국 축구팀을 응원하는 붉은 악마라고 했다. 나는 담배를 다 피자 꽁초를 창문밖으로 버렸다.
“근데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내가 물었다.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동해로 간다고 했잖아?”
“동해라? 좋은 곳이지.”
이라크에선 전쟁을 하고 우리는 동해로 간다. 지구는 하나인줄 몰라도 세계는 결코 하나가 아니다. 지구에는 200개가 넘는 나라들이 있으며 이 나라는 저 나라와 싸우고, 또 다른 이 나라는 또 다른 저 나라와 싸운다. 세계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세계를 하나로 만들려 했던 히틀러는 결국 실패했다.
앞에 휴게소가 보였다.
“우리 좀 쉬다 갈까?”
채신이 물었다.
“그래.”
나는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채신은 휴게소 앞에 와서 차를 멈췄다. 우리는 차에서 내린 후 휴게실 음식점으로 가서 콜라와 햄버거를 먹었다. 내 여자친구인 채신의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그녀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영어선생이다. 나는 아직까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인간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채신에 대해서는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채신은 영어를 잘 한다는 것과 이쁘다는 것을 빼면 시체다.
채신이 이쁜 이유는 얼굴을 뜯어 고쳤기 때문이다. 그녀는 얼굴을 뜯어 고치기 전에도 보기 싫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뜯어 고친 얼굴을 먼저 봤고, 나중에야 얼굴을 뜯어 고치기 전의 그녀의 사진을 봤기 때문에 사진속의 그녀가 무척 못 생겼다고 느꼈다. 나는 그 경험으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아마 내가 그녀의 뜯어 고친 얼굴보다 그녀의 타고난 얼굴을 먼저 보았다면 사진속의 그녀가 못 생겼다고 느끼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나는 콜라와 햄버거를 다 먹고 나서 또 담배를 꺼내 피웠다.
“또 담배야?”
채신이 못 마땅한 듯이 내뱉었다.
“너도 한 번 피워 볼래?”
그녀는 요상한 동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도대체가 넌 정말 이해가 안 돼. 남자들은 여자가 담배 피는 거 못 마땅해 하던데. 심지어 대학 다닐 때 어떤 선배는 후배 여자가 자기 앞에서 담배 피는 걸 보더니 그 자리에서 따귀를 때렸다고. 그 선배가 좀 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남자들은 여자들이 담배피는 거 싫어하는 게 정상 아냐?”
“그 인간이 미친 놈이지. 담배 피는 게 뭐가 나쁘다고?”
“담배는 몸에 나빠.”
“햄버거랑 콜라도 몸에 나쁘긴 마찬가지야.”
“햄버거와 콜라는 담배랑 달라.”
“다르지. 햄버거와 콜라는 담배가 아니니까.”
나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채신은 여전히 요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채신이 햄버거와 콜라를 다 먹자 우리는 다시 차로 돌아왔다. 그녀가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뉴스를 한다는 방송이 들리자 채신은 음악프로그램을 하는 곳으로 주파수를 돌렸다.
“방금 전 거기 놔 두면 안 돼?”
“뉴스가 뭐가 재밌다고?”
채신은 다시 주파수를 돌렸다. 첫 소식으로 이라크 전쟁에 관한 뉴스가 했다.
“이라크에 전쟁났어?”
채신이 뜻밖이라는 소리로 물었다.
“응.”
“언제?”
“나흘전에.”
“한심한 나라군. 전쟁이 났는데 축구를 하다니?”
“그러게 말야.”
나는 채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이라크 전쟁에 관한 뉴스가 끝났다.
“난 잘 거니까 니가 듣고 싶은 거 들어.”
나는 눈을 붙였다. 뉴스를 싫어하는 채신은 한밤의 음악여행이라는 프로가 하는 곳으로 주파수를 맞췄다. 다행히 자장가와 같은 조용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시끄러운 음악은 질색이다. 그래서 사람많고 시끄러운 도시가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