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러한 부담감도 고조가 9시 전에 법정에 들어섰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9시 전까지 법원에 도착하려면 늦어도 8시에는 고조가 집에서 출발했어야 했다. 하지만 고조는 8시가 훨씬 넘은 시각에, 그것도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겨우 8시 30분쯤에 현관문을 열 수 있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연 후에도, 고조는 현관문 주위를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그곳에서 맴돌기만 했다. 열려진 현관문을 통해 집 밖과 집 안을 구분지으면서 그 사이를 지루하게 넘나들기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9시가 다 되어서야 고조는 서둘러 현관문을 걸어잠그고 아파트 복도를 걸어갔다. 그럼에도 고조가 불과 한 시간만에 외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적처럼 7시 30분에 잠을 깬 고조는 8시 전에 벌써 외출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외출할 때면 반드시 입어야 하는 갈색 양복도 꺼내 입고 이미 정각 8시에 현관문의 손잡이를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대로라면 고조는 절대 오늘처럼 한 시간만에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갈색 양복을 입은 채, 변함없이 현관문을 여는 데에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을 것이고, 현관문을 연 뒤에도 고조는 두 시간 가까이 그 경계를 넘나들며 외출에 대해 망설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까스로 아파트 복도에서 현관문을 걸어잠근 뒤에도, 고조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와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하는 동작을 약 30분 가까이 반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 시간 삼십 분 동안, 고조로서는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 때문에, 자기 혼자 현관 앞에서 그것과 실랑이를 벌이다 겨우 그날 외출에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그나마 고조가 외출에 성공할 확률은 다섯 번에 한 번 꼴로 매우 희박했다. 기어이 외출하기를 포기하고 다시 현관문을 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러니 오늘처럼 단 한 시간만에, 그것도 다섯 번에 한 번 꼴로 성공할 수 있는 외출을 이렇게 간단히 성사시켰다는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9시에 현관문을 나선 고조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엘리베이터는 다섯 개 층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동안, 고조는 불안한 듯 계속 현관문 쪽을 쳐다보았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고조는 고개를 들어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것을 표시해주는 숫자를 잠깐 쳐다보았다. 이제 세 층만 더 내려오면 엘리베이터의 문은 고조 앞에서 열릴 것이다.
고조는 다시 고개를 돌려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자신이 평소보다 너무 서둘러 나온 탓에, 틀림없이 자신이 현관문을 잠그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외출에 대한 망설임에서는 벗어난 상태였지만,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해야 하는 불안감에서는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고조는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지금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하러 간다면, 엘리베이터는 아마 고조가 타야 할 층에서 잠깐 멈춘 후에 곧이어 문을 닫고 아래로 내려가거나 다시 위로 올라갈 것이 분명했다. 이 시간에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벌써 9시가 넘은 시각이라서 고조는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몸은 조금씩 현관문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제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두 개 층의 여유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순간 고조는 현관문까지 갔다오는 데 걸리는 시간과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시간을 빠르게 계산해보았다.
'지금 서 있는 위치에서 복도 끝에 있는 현관문까지의 거리는 약 30걸음 남짓이다. 뛰어가면 5∼6초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뛰어가면서 왼손으로 바지주머니에 있는 열쇠를 꺼낸다면, 현관문 앞에 도착해서 손잡이를 돌려보고 보조 잠금 장치에 열쇠를 꽂아 잠금 상태를 확인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초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엘리베이터 앞까지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포함해서,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총 14∼16초가 걸릴 것이다. 빠르면 14초안에 일을 마무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14초의 시간만 주어지면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엘리베이터의 속도다.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그리 빠른 편은 아니라 할지라도, 한 층 내려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2초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게다가 층 수의 여유라고는 고작 두 개 층밖에 없는 상태여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후 문이 열렸다 닫히는 데 걸리는 시간을 포함한다고 해도,
겨우 9∼10초 정도면 엘리베이터는 아래로 내려가거나 아니면 다시 위로 올라갈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계산대로라면 4∼5초의 시간을 더 확보해야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한 후 가까스로 엘리베이터를 탈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재판은 이미 예정대로 정각 9시에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 내가 있는 바로 위층에서 누군가가 엘리베이터를 타면 되는 것이다. 지금 엘리베이터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안 탄 상태이다.'
고조가 처음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을 때, 그것은 분명 다섯 개 층 위에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고조가 화살표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를 작동시켰을 때에야, 그것은 비로소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물론 도중에 엘리베이터가 멈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조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다섯 개 층 위에 올라가 있는 엘리베이터를 작동시키려고 화살표 버튼을 누르려 할 때, 그 층에서 누군가가 고조의 손동작과 거의 동시에 엘리베이터를 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고조가 화살표 버튼을 누르자마자 엘리베이터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곧바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고조가 생각해낸 가능성은 이런 것이었다. 만일 위층에서 누군가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화살표 버튼을 누른 상태라면, 엘리베이터는 그 사람 때문에 위층에서 잠시 멈출 것이다. 곧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위층에 있는 사람은 엘리베이터 내부를 훑어본 다음, 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를 탈 것이다. 그리고 타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엘리베이터였기 때문에, 위층의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자신이 내릴 층의 번호가 새겨진 1이라는 버튼을 누를 것이다. 그 다음,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습관처럼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를 것이다. 그가 닫힘 버튼을 누르면 엘리베이터는 조금 전 문이 열리던 속도와 일정하게 다시 출입문을 닫고 아래로 내려올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의 시간을 계산해보면, 엘리베이터가 어느 한 층에서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고조는 4∼5초 정도로 보았다. 거기에다, 위층의 누군가가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면 시간은 더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이처럼 누군가가 만일 위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탄다면, 그 타는 시간을 포함해서 엘리베이터가 바로 아래층에 있는 고조를 태우기 위해 잠시 멈췄다 다시 문이 닫히기까지의 시간은, 고조가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하고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인 14초와 일치했다. 그러므로 고조가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한 후 아슬아슬하게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고조는 곧장 현관문 쪽으로 달려갔다.
물론 고조가 생각한 가능성은, 이미 그것 자체만으로도 실현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다. 그럼에도 고조가 현관문 쪽으로 달려간 이유는, 자신이 생각한 그 가능성의 확신 때문이 아니라, 단지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바로 위층에서 누군가가 엘리베이터를 타면 된다는 가능성, 그것보다 더 실현될 확률이 적은 가능성을 생각했더라도 고조는 분명 현관문 쪽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조차 생각해내지 못했더라도, 그는 자신의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분명 현관문 쪽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이처럼 고조가 생각한 가능성은, 그것 자체로서의 실현 가능성보다는 단지 불안감에 의해서 떠오른 일종의 반사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현관문까지 뛰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고조는 자신의 왼쪽 바지주머니에 들어 있는 열쇠를 매우 자연스럽게 꺼냈다.
아파트 현관 앞에서 고조는 잠시 시계를 쳐다보았다. (9시 15분) 재판은 이미 예정대로 시작했을 것이다. 고조는 서둘러 현관 앞 계단을 내려갔다. 자신 때문에 혹시 재판이 조금 지연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 설사 재판이 진행 중이라 하더라도, 고조는 무조건 법원에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계단을 다 내려온 고조는 길 건너편에 서서 자신이 살고 있는 9층 복도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 고조는 습관적으로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 안에서 네모로 접힌 종이 쪽지가 손에 잡혔다. 그 순간 고조는 등 쪽에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그것 때문에 몇 번이고 자신의 등뒤를 돌아다보곤 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아파트 쪽으로 달려갔다. 엘리베이터가 위층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에 고조는 9층까지 비상 계단을 이용해 단숨에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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