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은 오전 9시에 진행될 예정이다. 그러니, 늦어도 8시까지는 법원에 도착해야 한다. 재판이 진행되는 시간보다 일찍 법정에 들어섬으로써, 재판에 대한 나의 높은 관심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고조는 법정에 일찍 들어서서 초조하게 재판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는 것으로도, 재판관이 절대 살인자들을 가볍게 심판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검사 역시 한 시간이나 일찍 법정에 도착한 자신을 의식해서라도, 살인자들을 결코 가볍게 신문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만일, 재판관이나 검사의 판결이 조금이라도 살인자들을 옹호하는 쪽으로 비친다면, 방청석에 있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한 시간이나 일찍 법정에 들어선 고조의 행동 때문에라도 이번 판결은 무효라며 거칠게 난동을 부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고조는 오히려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재판관과 검사, 살인자들을 번갈아가며 노려볼 작정이었다. 그런 행동이 판결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그리고 살인자들에 대한 증오의 표현으로 매우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 재판관과 검사는 마치 자신들이 죄인인 듯 고조의 눈을 피해 법정을 서둘러 빠져나갈 것이고, 살인자들은 자신을 노려보는 고조의 침착하면서도 냉정한 눈빛에서 살기를 느낄 것이다. 게다가 폐정이 되고서도 고조가 한동안 법정을 떠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그 소식을 전해들은 살인자들(재판관과 검사 포함)은 고조의 분노 덕분에 정신적으로 심한 압박감에 시달릴 것이다.
비록 살인자들의 형량이 자신의 생각보다 가볍다고 느껴져도, 고조는 절대 법정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누군가 자신을 법정에서 끌어낼 때까지 고조는 침묵으로 일관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오히려 그것이 가장 섬뜩할 것이라 생각했다.
'한 시간 미리 법원에 도착해서 재판에 대한 관심을 사람들에게 내비칠 것. 설사 살인자들에 대한 판결이 생각보다 가볍게 내려져도 절대 동요하지 말고 침착하게, 그것도 침묵을 지키면서 재판관과 검사, 살인자들을 노려볼 것.'
재판관과 검사는 한 시간이나 일찍 법정에 들어선 고조를 의식해서 살인자들을 심판하는 데 다소 부담을 느낄 것이다. 원칙보다 더 심한 신문과 판결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고조는 그들이 느낄 부담감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고조는 다음에 벌일 행동도 미리 생각해두었다. 만일, 검사가 고조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살인자들에게 가벼운 신문을 한다면, 또한 재판관이 한 시간이나 일찍 법정에 들어선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살인자들에게 가벼운 형량을 내린다면, 분명히 방청석은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리고 입회한 경찰관들이 그들의 소란을 저지할 것이다. 하지만 고조는 침묵으로 일관한 채, 재판관과 검사를 마치 죄인처럼 노려볼 작정이다. 그리고 살기를 느낄 만큼 섬뜩한 시선으로 오히려 살인자들을 노려볼 작정이다. 그렇게 되면 재판이 끝난 후에도 재판관과 검사, 살인자들은 고조의 눈빛 때문에 정신적으로 심한 압박감에 시달릴 것이다. 이처럼 고조는 그들이 시달리게 될 압박감을 이용하기로 했다.
자신이 법정에 한 시간 일찍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재판관과 검사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고조는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살인자들은 결국 중형을 선고받을 것이 분명했고, 그럼에도 고조는 역시 침묵을 고수한 채 조용히 법정을 나설 생각이었다. 그리고 혹시 자신의 예상대로 재판 결과가 나지 않고 재판관이나 검사가 살인자들에게 가벼운 형량만을 선고한다면, 고조는 나름대로 부담감이나 압박감을 이용해 살인자들(재판관과 검사 포함)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는 상당히 희박하리라고 고조는 생각했다. 자신이 한 시간이나 일찍 법정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재판관이나 검사는 고조를 상당히 부담스러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일종의 압박감으로 작용해, 결국 재판의 판결은 고조를 만족시켜줄 것이 분명했다. 재판이 끝난 뒤에도 고조는 계속 침묵만을 고수하면 되는 것이었다.
자명종이 고장난 상태였음에도 정확히 아침 6시 30분에 고조는 눈을 떴다. 덕분에 외출할 준비를 30분만에 끝마친다면, 고조는 예상대로 재판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법정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법정에서는 갈색 양복 대신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는 것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심리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고조는, 주저없이 옷장에서 검은색 양복을 꺼내 입었다. 마침 옷장에는 깨끗하게 손질된 검은색 양복이 여러 벌 걸려 있었다. 고조가 외출할 준비를 모두 끝마친 시각은 정확히 7시였다.
현관문을 열기 위해 잠금 장치를 풀고 나서 손잡이를 막 돌리려는 순간, 고조는 갑자기 팔에 쥐가 났는지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손잡이를 돌려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호흡을 멈춘 채 껑충 뛰다시피 몸을 날려 집 안에서 빠져나왔다. ('곧장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라고 요약해도 무방하다. 그만큼 그의 동작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 고조는 왼쪽 바지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손잡이 부분과 그 위쪽에 달린 보조 잠금 장치에 각각의 열쇠를 꽂아 두 번씩 돌려가며 꼼꼼히 잠금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손잡이를 돌려 현관문을 열어보았다.
고조는 아파트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랐다. 엘리베이터는 이미 고조가 타야 할 층에 세워져 있었으므로, 곧장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시간은 이제 겨우 7시 10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8시까지 법정에 들어서려던 계획은 물론이고, 잘하면 8시 전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 재판관과 검사가 느낄 부담감이나 압박감은 이로 인해 더 커질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검은색 양복까지 입고 나타난 자신 때문에 법정의 분위기는 더 한층 고조될 것이고, 그런 분위기를 의식해서 재판관과 검사는 남다른 사명감에 불타 살인자들을 신문하고 판결할 것이 확실했다. 이런 생각 덕분에 고조는 갈색 양복 대신 검은색 양복을 입고 나온 자신의 결정을 스스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 만족감과 동시에 고조는 잠시 검은색 양복의 출처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은 검은색 양복을 구입한 기억이 없음에도, 옷장에는 여러 벌의 검은색 양복이 깨끗하게 손질된 채 걸려 있었다. 그리고 양복을 꺼내면서도 고조는 마치 습관처럼 그 옷들을 훑어보았다. 벽에 걸린 액자를 대하듯, 옷장 안의 검은색 양복 역시 고조의 눈에는 꽤 익숙한 것이었다. 자신이 꾸었던 꿈을 그대로 그렸다는 어느 화가의 그림은 오래 전부터 한 쪽 벽에 방치되듯 걸려 있었다. 유리 표면의 먼지 때문에 이제는 그림 자체도 꿈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고조에게 있어서 그 그림은 벽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 그림을 벽에서 떼어낸다면, 분명 방 안 전체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일대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만큼 그 그림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벽에 걸린 상태에서의 그림의 지위는, 그저 벽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림은 고조에게 너무 익숙한 물건이었다. 고조는 습관처럼 그 그림을 대할 뿐이었다. 그리고 고조는 옷장 안에 있던 여러 벌의 검은색 양복을 보면서, 마치 벽에 걸린 그림을 대하듯, 동일한 감정으로 그 옷들을 쳐다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검은색 양복이 옷장 안에 있는 것은, 그림이 벽에 걸려 있는 것만큼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것이, 고조는 뒤늦게 검은색 양복에 대한 출처를 의심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고조는 옷을 구입한 기억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출처에 대한 의문은 검은색 양복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림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조는 자신이 그 그림을 언제부터 한 쪽 벽에 걸어놓았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단지 그 그림은 언제나 그곳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검은색 양복에 대한 고민은 사라졌다. 출처 따위가 문제될 것은 없었다. 검은색 양복 역시 벽에 걸린 그림처럼 언제나 옷장 안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고조는 아파트 현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현관 앞 계단을 내려오다 잠시 멈춰섰다. 그 사이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고조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고조는 그때까지도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었다. 그 사이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고조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또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져나왔다. 그들은 고조를 지나쳐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고조는 그때까지도 움직이지 않고 계단에 서 있었다.
고조는 아파트 현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현관 앞 계단을 내려오다 잠시 멈춰섰다. 그 사이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고조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고조는 그때까지도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었다. 그 사이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고조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또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져나왔다. 그들은 고조를 지나쳐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고조는 그때까지도 움직이지 않고 계단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