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7시 10분일 것이다. 이제 계단을 마저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전동차를 타기 위해 역까지 가야 한다. 하지만 뛰어갈 필요는 없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5분만 걸어가면 지하철역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 계단부터 마저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전동차를 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는 것은 아파트 복도를 걷는 것만큼이나 편안한 동작이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계단을 오르내린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동작이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지금쯤 나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고조는 아파트 현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현관 앞 계단을 내려오면서 잠시 시계를 쳐다보았다. (7시 10분) 8시까지 법원에 도착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고조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역까지 가는 데에는 5분이면 충분했다.
계단을 내려온 다음 몸을 왼쪽으로 90도 튼다. 그리고 곧장 211걸음 걷는다. 이번에는 몸을 오른쪽으로 45도 정도 틀어야 한다. 그 상태에서 60걸음 걷는다. 여기까지 걸어왔다면 그는 이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난 것이다. 이제부터는 몸을 다시 왼쪽으로 45도 정도 틀어서 곧장 367걸음을 걸어야 한다. 지하철역 입구는 왼쪽에 있다. 그러니 몸을 다시 왼쪽으로 90도 틀어 5걸음, 그리고 또 한 번 왼쪽으로 90도 틀어 3걸음 뒤에 나타날 64개의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그는 지금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전동차를 타기 위해서라면 조금 더 걸어야 한다. 계단을 내려온 상태에서 곧장 15걸음 걷는다. 몸을 왼쪽으로 90도 틀어 26걸음 걷는다. 그의 앞에는 왼쪽으로부터 세 번째, 그리고 오른쪽으로부터는 여섯 번째인 개표 기계가 버티고 있다. 그것을 통과하자마자 곧장 34걸음 걷는다. 그리고 몸을 왼쪽으로 90도 틀어서 5걸음 걷는다. 또 한 번 몸을 왼쪽으로 90도 틀어 3걸음,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39개의 계단을 내려간다. 이제 그는 그곳에서 전동차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시간은 정확히 5분이 흘렀다.
7시 15분, 고조는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전동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고조가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행동에 싫증을 느낄 즈음, 마침내 전동차가 역 안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고조는 길게 늘어선 줄의 맨 끝으로 걸어갔다. 고조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전동차가 들어오기만을 숨죽이고 기다렸다. 하지만 신호음이 들린 후에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전동차는 역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초조해 하는 사람은 고조 혼자뿐이었다. 몇몇 사람만이 줄에서 이탈해 의자 쪽으로 걸어갔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계속 전동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표정 역시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고조는 다시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전동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역무원의 실수로 신호음이 잘못 울린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고조는 사람들 사이를 오가던 행동을 멈추고, 한 쪽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만일 전동차가 오지 않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이곳에 서 있을 것처럼,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어느 한 곳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고조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고조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지금 이곳에는 움직임도 없고, 소리도 없었다. 고조는 피로감을 느꼈다.
전동차가 역 안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들렸다. 다시 사람들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조도 늘어선 줄의 맨 끝으로 걸어가, 그들처럼 차려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뒤이어 전동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다시 차려 자세를 풀었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역을 통과해버린 전동차를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단지 차려 자세만을 푼 채 여전히 전동차를 기다릴 태세였다. 몇몇은 조금 전에 자신들이 앉아 있던 의자로 되돌아갔다. 고조는 또다시 피로감을 느꼈다. 더 이상 전동차를 타고 싶은 생각도, 그리고 법원에 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신호음이 울린다 해도 전동차는 이곳에서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고조는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단지 꿈일 뿐이라고 중얼거렸다. '전동차는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법원에 가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서 이 모든 것이 거짓이다. 이곳이 사라질 동안만 나는 여기에 남아있으면 된다. 꿈은 그런 것이다. 꿈은 그런 것이다.'
고조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7시 20분) 자칫하다가는 8시까지 법원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다. 고조는 지하철역을 빠져나가 택시를 잡아타기로 했다. 아무래도 전동차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고조가 막 걸음을 옮기려 할 즈음, 또다시 신호음이 들려왔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전동차를 타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고조는 이번 한 번만 더 전동차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고조는 그들을 따라 전동차를 타기 위해 줄의 맨 뒤에서 차려 자세를 취했다.
전동차 안은 약간 후텁지근했다. 고조는 출입문에 몸을 기댄 채, 손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전동차 안의 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전동차를 탔다는 안도감 때문에서인지 고조는 잠시 나른함을 느꼈다. 고조는 몸을 반대로 돌려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비뚤어진 넥타이를 고쳐매고 머리를 매만졌다. 고조는 법정에서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재판 과정을 지켜보리라 다짐했다. 방청객들 사이에서 '어떻게 저리 태연할 수가 있지'라는 말이 새어나올 만큼, 고조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재차 다짐했다. 다시 출입문에 몸을 기대면서 조금은 안정감을 찾았는지, 고조는 습관적으로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 안에서 네모로 접힌 종이 쪽지가 손에 잡혔다. 꺼내 보니 그것은 고조가 오래 전에 어느 신문 기사를 오려놓은 것이었다. 물론 고조는 그 종이를 보자마자, 그것이 어떤 기사인지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종이가 어떻게 해서 바지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고조는 지하철 안을 잠시 훑어본 다음, 조심스럽게 신문 기사를 펼쳐보았다.
'장님인 50대 사내 자신의 아파트에서 피살'
25일 이웃집 아주머니에 의해 발견된 시체는 54세의 고유기씨로, 10년 전 부인과 이혼하고 아들(고조, 26세)과 단 둘이 생활했다고 한다. 발견 당시 고씨는 갈색 양복을 입고 있는 상태였고, 전깃줄로 손발이 묶인 채 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죽어 있었다고 한다. 얼굴 쪽에서부터 흘러내린 피 때문에, 고씨의 얼굴이 마치 피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고 아주머니는 말했다.
경찰은 장님인 고씨가 왼쪽 이마에 여러 차례 흉기로 찔린 상처가 있었다고 말했다. 텔레비전 위에 놓인 공구 상자가 열려 있는 것으로 봐서, 범인은 손발이 묶인 고씨의 왼쪽 이마를